김창록 전 산업은행 총재(68)는 산은의 ‘마지막 총재’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산은이 일반 은행과 같은 기능을 하면서도 총재로 불리는 데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며 그를 공개적으로 질타했다. 결국 총재란 명칭은 행장으로 격하(格下)되고 김 전 총재는 옷을 벗었다. 지난 정부 사람으로 제대로 찍힌 그는 이후 보수 정권 10년간 별다른 부름을 받지 못 하다 요즘 차기 은행연합회장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주 취임한 김용덕 손해보험협회장(67)은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금융당국 수장으로 문재인 캠프 정책자문단에서 활동했다. 국제금융 전문가라 보험 경력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28년 만의 장관급 회장에 거는 보험업계의 기대가 크다. 그는 최종구 금융위원장의 고려대 선배로 행시 기수도 10년이나 높다.
한동안 기억에서 잊혀졌던 역전(歷戰)의 관료들이 속속 현업으로 돌아올 태세다. 고령에도 일을 하려는 본인의 희망, 기왕이면 ‘센 분’을 모셔 와서 업계 이익을 도모하겠다는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10년 만의 정권 교체도 ‘올드보이’의 귀환과 맥을 같이한다. 복귀 소식이 들리는 사람들이 죄다 진보 정부에서 감투를 썼던 인물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근 활약을 재개한 전관(前官)의 범위는 20년 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그중 많은 이를 놀라게 한 인물은 이근영 전 금감위원장(80)이다. 그는 2003년 대북 송금 의혹사건으로 구속 기소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거의 15년간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져 있었다. 그러다 한 달여 전 동부그룹 회장으로 재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홍재형 전 경제부총리(79)와 전윤철 전 감사원장(78)도 민간 협회장에 하마평이 나오고 있다. 홍 전 부총리는 관료사회의 실력자로 은행장·청장을 단골처럼 하다가 23년 전 김영삼 정부에서 부총리를 했다. 전 전 원장은 ‘직업이 장관’이라는 말을 십수 년 전에도 들어온 인물이다. 이런 슈퍼 시니어 거물들이 이제 다시 나타나서 다른 퇴직 관료들과 구직 경쟁을 벌인다는 말이 나오니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이 많다.
어느 자리에 몇 살까지만 취업할 수 있다는 법 조항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지켜져 온 나름의 관행과 이유가 있다. 중앙부처 관료들은 50대 초·중반 공직에서 은퇴하면 60세 안팎까지 기관장이나 민간기업 임원을 한 차례 지내고 집에 가는 게 ‘기본 루트’다. 퇴직 관료의 재취업에도 묵시적 정년이 있는 것은 이들이 받는 고연봉이 관료 생활을 밑천에 깔지 않고서는 애초에 불가능한 특혜이기 때문이다. 민간기업 오너도 대략 70세 전에는 경영권 승계를 하는 게 암묵적인 룰이다. 금융지주 회장 역시 67∼70세의 나이 제한 규정이 있다.
유럽은 30대 총리와 대통령이 나오는 시대라는 이유로 이들 ‘7080’의 약진을 무조건 노욕(老慾)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정권과 코드를 맞추기 위해 이런 원로들을 다시 소환할 정도로 우리 사회의 편 가르기가 심각하다는 점이 씁쓸할 뿐이다. 또 산하기관·협회를 두세 번씩 돌면서 70이 넘도록 현역을 유지하면 후배 장관에게도 본의 아니게 누(累)가 될 수 있다. 영화(榮華)를 누릴 만큼 누리고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쌓아온 분들이 월급봉투 한 번 받아보는 게 소원인 구직 청년들, 팔팔한 나이에 조직에서 밀려나 치킨집을 차려야 하는 은퇴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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