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하게 포장된 수십 가지 반찬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취나물무침, 콩나물무침, 계란말이, 콩자반…. 4개를 집으면 5000원. 반찬을 주워 담는 손님들의 손길이 바삐 움직이고 묵직한 비닐봉지와 5000원짜리 지폐가 속속 교환된다. 밑반찬 백화점 옆에서는 한 청년이 열심이 배추김치를 담그고 있다. “이모 여기 맛 좀 봐주세요.” “됐네, 됐어.” 고무장갑을 낀 청년 앞에 놓인 배추김치, 오이김치, 겉절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6일 오후 서울 강서구 송화벽화시장 내 ‘세 자매 마트’의 풍경이다. 세 자매 마트는 사실 생긴 지 한 달밖에 안 됐다. 추석 연휴 때 간판을 걸었다. 그렇다고 이 시장 새내기라는 얘기는 아니다. 1남 4녀 중 셋째 선채자 씨(57)는 이미 18년 전부터 바로 앞자리에서 전을 구워 팔았다. 몇 년 전 둘째 채심 씨(64)가 반찬가게를, 넷째 채영 씨(55)가 김치가게를 냈다. 전남 고흥 출신인 세 자매는 음식 솜씨를 타고났다. 손님들이 줄을 이었고 가게를 넓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마침 채자 씨의 전 가게 앞 슈퍼마켓 자리가 났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인수하고 세 가게를 합쳐 버렸다. 그래서 이름이 세 자매 마트가 됐다. 일손이 모자라다 보니 채심 씨와 채자 씨 아들들이 하나씩 나와 가게 일을 도와준다. 첫째인 오빠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고향인 고흥에서 방앗간을 하는 친척 동생이 고춧가루 등을 보내온다. 채영 씨는 “자매끼리 일하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그래도 좋은 점이 더 많다”며 웃었다.
세 자매가 요즘 더 신나는 이유는 젊은 손님들이 많아져서다. 시장이 깨끗해지니 마트만 갈 것 같은 신혼부부들도 이곳을 찾아 장을 봐 간다. 매일 오전 6시에 출근하는 것이 고되지만 장이 끝나는 오후 8시쯤 반찬이 다 팔려서 텅텅 빈 테이블을 보면 힘이 난단다.
송화벽화시장을 찾은 시간은 오전 11시 반경. 이미 시장은 오고가는 손님들로 활력이 넘쳤다. 7555m²(약 2285평) 부지에 103개 점포가 있어 시장 규모가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지하철 5호선 우장산역 바로 인근인 데다 주변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가 많아 유동인구가 크게 늘었다. 무엇보다 전통시장만의 차별화된 매력을 확실히 가꾼 탓에 주변의 대형마트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시장을 둘러보다 ‘신장개업’이라는 현수막이 붙은 그릇가게가 눈에 띄었다. 이대규 씨(46)의 ‘진성그릇’이다. 이 씨는 직전 사장과 인수받은 물품 수량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이 씨는 “인근에 저가상품 전문 대형유통업체가 있지만 전통시장에 올 분들은 따로 있다. 그분들을 위해 차별화된 물건들을 갖춰놓았다”고 했다. 이 씨는 그릇가게와 붙어 있는 ‘진경나물반찬’에서 어머니를 도와 10년간 일했다. 그가 새 가게를 내느라 바쁜 사이 반찬가게는 동생 이흥규 씨(43) 내외가 돕고 있다. 흥규 씨도 그릇가게 옆에 방앗간을 내기로 했다. 방앗간은 인테리어공사가 한창이다. 대규 씨는 “어머니의 반찬가게는 옆 가게에 미안할 정도로 줄이 길게 늘어섰었다. 저나 동생이나 전혀 새로운 업종에 도전하는 거지만 자신있다”고 했다.
송화벽화시장은 ‘신구(新舊) 조화’가 잘 이뤄진 시장이다. 70% 정도는 2003년 상인조합이 생기기 전부터 시장을 삶터로 삼아온 이들이다. 나머지 30%는 젊은 청년 상인들을 포함한 새로운 얼굴로 채워졌다. 시장이 활성화되다 보니 상인들도 신이 난다.
서울시내에 있는 수백 곳의 전통시장 중 가게 권리금이 1억 원 이상인 몇 안 되는 시장 중 하나라는 게 조합 측의 설명이다. 세 자매 가게나 진성그릇처럼 기존 상인들이 아예 가게를 넓히는 사례도 많다. 새로 들어온 청년 상인들은 활력을 더해 주는 요소다. 물론 30년 이상 된 터줏대감들이 중심을 지켜주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장 한쪽 구석에 자리한 ‘경상도집’은 1979년부터 여기에 있었던 식당이다. 이 시장이 자생적으로 생긴 시점이 1974년이라고 하니 사장인 진점이 할머니(77)는 이곳의 살아 있는 역사다. 경상도집은 돼지갈비를 불고기처럼 자작한 육수에 넣어 끓여주는 ‘물갈비’가 유명하다. 점심시간인 낮 12시 반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진 할머니의 통화를 들어보니 아마도 차를 가지고 오는데 내비게이션만으로는 잘 찾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이고, 차 델 데가 없심니더. 애도 있으면 오기 힘들텐데, 아이고 별나라. 그라믄 여 앞에 주차장에 차 세우고 오이소.”
20분 쯤 후 들어선 한 가족. 친정어머니와 한 아이씩 나눠 데리고 온 딸이 “맛있다고 소문나서 멀리서 찾아왔다”고 생색부터 낸다. 같은 시각 직장인들로 보이는 여섯 명이 아예 낮부터 회식판을 벌였다. 두 청년은 오랜만에 왔는지 반갑게 인사를 건네더니 직장 얘기며, 창업 얘기며 딱 그 또래들이 할 만한 대화를 이어간다.
진 할머니는 “예전에야 상인들이나 인근에 사는 단골들만 찾아왔다면 요즘은 어떻게 알았는지 멀리서도 많이들 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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