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나흘 앞둔 19일 충남 천안시의 한 딸기농장에 앳된 얼굴의 10대 소년이 눈에 띄었다. 그룹 맨 앞줄에 선 소년은 농장주가 들려주는 ‘귀농 이야기’가 신기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천연살충제 재료로 쓰이는 제충국의 모종 심기 체험을 할 때 눈동자가 조금 더 또렷해졌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모종을 옮기고는 다부지게 주변 흙을 끌어모았다. 소년은 마치 놀이공원에 온 것처럼 농장 이곳저곳을 살피고 농기계를 만졌다. 23일 수능을 치르는 고3 수험생 강현성 군(18)은 친구들이 ‘수능 1주일 족집게 특강’에 몰두하는 사이 청년 농부들을 만나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농사꾼이 꿈이라는 그는 동아미디어그룹이 주최한 ‘청년 창농열차’의 최연소 참가자다. 지난달 충남 서천에 이어 두 번 연속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강 군은 1박 2일 동안 천안 농가 곳곳을 눈과 귀에 담았다. 강 군은 “열심히 노력한 만큼 거둘 수 있다는 게 농사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현장 경험과 전문지식을 좀 더 쌓은 후 준비가 되면 귀농할 것”이라고 했다.
청년 창농열차는 귀농·귀촌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지만 만 18∼39세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특징이 있다. 50, 60대 예비 은퇴자들이 주로 몰리는 다른 귀농 교육 프로그램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강 군처럼 먼 미래에 농업에 종사할 것이라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학생들은 물론이고 내년 또는 후년 귀농 계획을 가진 30대 부부까지 다양한 청년들이 열차에 올랐다.
이들 중 상당수는 도시 생활에 대한 회의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창농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1, 2회 모두 참가한 김운득(37), 박희원 씨(35·여) 부부는 청년 창농열차 외에 다른 귀농 관련 교육 프로그램에도 ‘개근’하고 있다. 올여름 박 씨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귀농 준비에 속도가 붙었다. 박 씨는 “도시 생활에 대한 염증도 있고 점점 줄어드는 직장인 수명을 보면서 불안감이 커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젊은 세대가 가진 참신한 아이디어를 농업에 접목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내비쳤다.
방송사에서 작가로 일하고 있는 석민창 씨(32)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팍팍한 도시의 삶에 회의를 느꼈다”면서 “내가 만족하는 삶이 중요하다. 처음 도전하는 일이라 쉽지 않겠지만 잘 만들어 간다면 분명 귀농에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보다 먼저 농촌에 터를 잡은 ‘귀농 선배’들은 농촌 생활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는 조언을 빠뜨리지 않는다. 지금이야 ‘억대 매출’을 내는 성공한 농부가 됐지만 시작은 불안함의 연속이었다. 기업 부동산개발팀에서 근무하다 귀농한 채의수 달마시안 제충국 대표(40)는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농사일에 적응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최소한 2, 3년간 먹고살 거리는 있어야 한다. 정부 지원에 혹해 귀농했다가는 1년 안에 짐을 싸서 돌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보기술(IT) 기업에서 기술자로 일하다 농촌에 터를 잡은 신성민 천안팜포유 대표(37)는 “정착 초창기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만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신 대표는 “혼자 모든 걸 하려고 하지 말고 마을 사람들이나 비슷한 작물을 재배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라”고 덧붙였다.
육체적 노동을 하는 ‘농사꾼’이 아닌 농업을 경영하는 ‘농업인’이 되라는 조언도 있었다.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는 박종필 성거산농원 대표(51)는 “청년이라면 농작물을 재배하는 개념을 넘어 농업을 경영해야 한다”면서 “농업은 육체적 노동보다 중요한 게 정신적 노동”이라고 했다. 박 대표는 귀농한 지 7년째가 되는 지금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농업이나 경영 관련 서적들을 보며 매일 공부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박두호 농업회사법인 두호 대표(48)는 미국에서 농업경제학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해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연구원으로 10년간 일한 ‘화이트칼라’였다. 그는 4년 전 귀농해 유기농법으로 딸기와 포도를 키우고 있다. 박 대표는 “기존 농민들과 차별화된 장점을 가진 상품을 찾아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최신 기술을 적극 활용해 내년에는 스마트팜도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지금 삶에 만족하시나요?”
말없이 조용하던 막내 강 군이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에서야 손을 번쩍 들더니 선배 귀농인에게 질문했다. 현실적인 고민이 담긴 다른 참가자들의 질문에 비해 단순했지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대기업을 떠나 농부가 된 채 대표는 “하고 싶은 걸 하는 일만큼 재밌는 건 없는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전직 IT 기술자 신 대표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매일이 기대된다”며 만족해했다.
두 번째 창농열차에 오른 탑승객들은 하나같이 “내가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도시라는 익숙한 공간을 떠나 농촌에서 또 다른 청춘을 준비하는 예비 청년 농부들의 미래가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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