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9월 8일 동아일보에 실린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 르망 광고.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하며 통행권을 받는 르망 운전자와 함께 탄 가족들의 표정에는 뿌듯한 웃음과 설렘이 담겼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명절이 되면 신문에는 ‘OO자동차를 타고 고향에 다녀오라’는 광고가 쏟아졌다. 1992년 추석을 앞두고 실린 현대자동차 엑셀 광고는 “엑셀 특보! 지금 계약하시면 추석 연휴 때 타실 수 있습니다”라며 구매를 독려했다. 이 같은 광고에는 명절 때 자동차 한 대 뽑아서 고향에 가 폼 내고 싶다는 로망이 담겨 있다. 당시 자동차를 소유한다는 것은 성공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자동차를 사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자동차 크기와 가격으로 성공의 정도를 구분 짓는 사람이 많아졌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00달러도 안 되던 시절에서 3만 달러를 바라보는 시간을 거치는 동안 한국인들의 소비력은 커졌다. 그만큼 소비하는 상품 종류는 늘고 크기는 커졌고 가격은 비싸졌다. 소유한 상품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건 씁쓸하지만 필연적 결과였다.
자동차가 대표적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1986년 현대차 그랜저 출시였다. 1991년 동아일보에 실린 그랜저 광고에는 “정상의 자부심이 빛나는 우리의 명차, 그랜저의 세계로 귀하를 초대합니다”란 문구가 눈에 띈다. 정상, 명차, 그리고 귀하라는 존칭까지. 좋은 차를 타야 대접받는다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기아자동차의 준중형차인 세피아 광고에 쓰인 “준중형급부터는 차의 격을 생각하십시오”라는 문구도 있다.
자동차 광고에 유독 화려한 문구가 많이 쓰이게 된 것은 이러한 인식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1992년 대우차 에스페로 광고에는 ‘지상비행’이란 문구가 쓰였다. 땅 위를 달리지만 하늘을 나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지금도 자동차 광고에는 과장이 심한 표현이 많다. ‘동급 최강’이란 말이 동급의 여러 자동차에서 수시로 쓰인다. 2000년대 들어서 자동차산업은 대표 수출 산업이 됐다. 20, 30대가 자동차를 구매하는 것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게 됐다. 젊은층을 겨냥해 “움직이는 것 중 가장 섹시하다”(2009년 현대차 투싼 광고)처럼 개성 있는 이미지를 강조한 자동차 광고들이 대세가 되기 시작했다.
아파트도 자동차와 더불어 소유자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하는 잣대로 자리 잡은 대표적 재화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대형 건설사들의 아파트 브랜드 광고에 잘 드러난다. 롯데건설의 아파트 브랜드인 롯데캐슬은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란 노골적 문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부동산 시장 활성화 정책을 폈고 분양가를 높일 수 있게 된 건설사들은 삼성물산 래미안, GS건설 자이 등 브랜드 아파트를 앞다퉈 선보였다. 광고에는 톱스타 연예인이 필수 공식처럼 등장했다.
초창기 아파트 광고는 정보 전달 위주였다. 1962년 11월 동아일보에 실린 마포아파트 광고에는 아파트 평수와 분양 접수 방법 등이 나열돼 있다. ‘재래생활방식을 지양하고 시민 여러분의 주택난을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우아한 현대식 6층 건물 아파트를 건설’한다는 소개 글이 당시 아파트가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90년대 들어서 광고는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당시는 분당, 일산 등에 1기 신도시가 조성되던 때다. 아파트 공급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집값 상승률이 떨어졌고 곳곳에서 미분양이 속출했다. 건설사들은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기 위한 광고를 만들어야 했다. 그 결과 동아일보 1995년 9월 19일자 현대건설 광고같이 전면으로 광고가 커졌다. 내용도 기본 단지 정보 외에도 “생명존중 건강룸”이나 “첨단 7대 시스템”같이 점차 다양한 내용을 담게 됐다.
세탁기 TV 같은 전자제품도 소비력 변화를 잘 드러낸다. 일상생활과 밀접한 기기인 만큼 제품이 바뀌면 사람들의 생활도 바뀌었다. 금성사(현 LG전자)는 1969년 국내 최초로 세탁기를 개발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생산을 중단해야 했다. 세탁기를 사치품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1973년 다시 세탁기를 내놓은 이후 금성사는 세탁기 사용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해 3월 광고를 보면 ‘(세탁기를 사용하면) 뜨개질을 하면서도 빨래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2kg을 대용량으로 표현한 것도 지금 기준으로는 신기한 일이다.
세탁기가 주로 주부들이 사용하는 제품인 만큼 광고는 주부들에게 얼마나 유용한 기능을 갖췄는지를 표현했다. 1992년 삼성전자는 ‘삶아 빠는 세탁기’를 개발하고 삶는 효과가 아니라 정말 삶는다고 강조했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드럼세탁기 광고에는 주부이지만 세련된 생활을 표현한 모습이 많이 나온다. 함부현 부천대 산업디자인과 교수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광고는 정보 전달에서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형태로 바뀌었고 이에 발맞춰 신문광고 디자인도 화려하고 다양해졌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