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인재 모이는 ‘대장간’… 대학 앞장서고 정부는 자금 지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1일 03시 00분


[3만 혁신기업이 3만달러 한국 이끈다]<1> 기업 아닌 기술에 투자하는 스위스

지난해 12월 21일(현지 시간) 스위스 로잔 로잔연방공대(EPFL).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이라 캠퍼스가 전반적으로 한산했지만 유독 붐비는 곳이 있었다. 학교 내 창업육성센터인 이노베이션 파크에 위치한 ‘라 포르주(La Forge)’라는 초기 창업자 입주공간으로, 10여 명이 창업 아이디어를 구상하며 사업 기획안을 만들고 있었다. 라 포르주는 프랑스어로 대장간이라는 뜻. ‘아이디어가 사업으로 연결되는 곳’이라는 라 포르주 슬로건 아래 제2의 ‘스티브 잡스’를 꿈꾸는 이들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통신공학 석사 출신 막시메 드루비 씨(38)는 “로잔연방공대에선 투자 유치 행사나 머신러닝 등 신기술 동향 관련 세미나 등이 수시로 열려 최신 기술이나 창업 동향을 빠르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디어만 좋으면 대학과 연구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해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창업 밑천으로 삼을 수 있다고도 설명했다.

스위스는 관광대국이라는 명성 못지않게 기술 기반 창업 강국으로도 유명하다. 기초 원천 기술을 바탕으로 로봇과 생명과학 등 신사업에서 발전을 이루고 있다. 스위스는 2017년 세계경제포럼(WEF) 국가 경쟁력 평가 부문 중 기업 혁신 역량 평가에서 1위에 올랐고 의료기술관련 기기·서비스 분야 기업만 1300여 개에 이른다.

○ 창업 초기 기업도 빠르게 기술 확보


지난해 12월 20일(현지 시간) 방문한 암 종양 분석 칩을 개발한 기업인 ‘루나포어’에서는 연구원 서너 명이 칩 위에 다수의 종양세포를 올려놓고 분석 중이었다. 이 칩과 분석기계는 종양세포가 악성인지 아닌지 20분 만에 판독할 수 있는 장비다.

루나포어는 로잔연방공대에 자리 잡은 실험실 기업이다. 유럽의 매사추세추공대(MIT)로 불리는 로잔연방공대 출신의 우수한 의공학 연구인력을 제품 개발에 참여시키고 있는데, 이들 주요 연구원의 월급은 정부로부터 지원받는다. 루나포어는 칩을 기반으로 한 암 진단 기술을 개발하겠다고 연방정부에 두 건의 연구계획 프로젝트를 제출해 승인받았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한 건당 2년에 걸쳐 평균 35만 스위스프랑(약 3억8000만 원)이 지원된다.

스위스 연방정부에서 스타트업 및 창업 기업 지원은 연방교육연구혁신부와 산하기관인 ‘이노스위스(전 기술혁신위원회)’가 담당한다. 우리로 치면 교육부에 해당하는 부처다.

이노스위스 아날리제 에기만 운영위원장(57)은 “결국 교육 시스템과 연구 역량을 튼튼하게 만들면 혁신기술이 나오고, 혁신기술은 자연스럽게 시장을 선도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기술 기반의 혁신기업 창업은 기초과학의 연구 성과가 결실을 맺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렇다 보니 단순 서비스 영역 창업에 대해선 정부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

또 스위스 정부는 기업에 직접적인 자금 지원을 하지 않는다. 정부는 기업이 대학이나 연구소 등과 연구를 위한 공동 협력체를 구성하면 이 협력체를 지원한다. 이러다 보니 창업 지원금은 주로 연구인력과 실험 인프라를 갖춘 쪽, 즉 대학으로 흘러들어간다.

연방정부가 2016년을 기준으로 연간 연구개발비로 지원한 2억 스위스프랑(약 2190억 원) 중 90%는 연구협력체 구성에 참여한 대학이 받아 관리했다. 이는 고스란히 연구원 인건비나 물품비로 사용됐다.

정부는 직접적인 자금 지원을 하지 않는 대신 연구를 돕고, 기업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기 위해 마케팅 등을 알려주는 멘토링 시스템을 운영한다. 루나포어 데보라 하인체 최고운영책임자는 “특허 등 초기 창업과 관련된 조언은 대학이, 마케팅과 글로벌 바이어 미팅 등은 정부가 각각 멘토링 시스템을 갖춰 놓고 지원한다”고 말했다. 루나포어는 기술 개발을 위해 해외 병원과의 협력이 꼭 필요했는데, 각국 주재 스위스 대사관이나 이노스위스 기술지원 담당자가 해외 병원 관계자와의 만남을 주선해주는 ‘정보창구’ 역할을 담당했다.

○ 대학이 기술 사업화 징검다리

최근 15년 동안 이노스위스에 제출된 기술개발 프로젝트 아이디어는 1만1000건. 이 중 절반가량인 5000건이 자금을 지원받았다. 두개골 절단 레이저 기술, 태양광 에너지로 움직이는 버스, 장애인 재활용 로봇, 신약 연구용 인공지능(AI) 플랫폼 등이 지원받은 대표적인 프로젝트다.

정부의 창업 지원이 대학이나 연구소를 통해서 이뤄지는 만큼 창업 초반 인재 확보가 힘든 초기 기업도 기술을 빠르게 확보할 수 있다. 드론 충격 보호용 장비를 개발한 ‘플라이어빌리티’가 대표적이다. 2014년 로잔연방공대 박사과정을 밟던 이 회사 창업자 아드리안 브리오드는 보호장비의 강도를 높이면 무거워지고, 제품을 경량화하면 강도가 약해지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이노스위스 지원을 받아 로잔연방공대와 공동연구가 이뤄져,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탄소섬유 구조물을 개발했다.

스위스식 혁신기업 성공모델에 따라 착실히 성장한 업체 중엔 유전자 분석을 통해 진단 및 약 처방 기술을 개발한 혁신기업 소피아제네틱스도 있다. 이 회사는 최근 미국 MIT 테크놀로지 리뷰가 선정한 50대 스마트기업으로 꼽혔는데 로잔연방공대의 멘토링과 입주 공간을 지원받으며 성장했다.

사업화 아이디어는 소피아제네틱스에서 냈지만 사업 초창기 기술 연구는 이노스위스 자금 지원을 받아 대학과의 공동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개인 유전자 자료를 바탕으로 자사의 인공지능(AI) 분석 플랫폼 기술을 개발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스위스와 대학이 가진 인적 네트워크와 우수한 자원이 더해지면서 성장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쥐르지 캉블롱 소피아제네틱스 대표는 “유전자 빅데이터 분석을 위해 머신러닝 기술자들이 필요했는데 로잔연방공대가 해당 분야 인재를 집중적으로 길러내고 있어, 이들 인력을 대학 측에 요청해 인재를 빠르게 확보했다”고 말했다. 소피아제네틱스는 이제 13만 명의 유전자 분석기록을 바탕으로 정밀한 유전자 분석과 처방을 내릴 수 있게 됐고 세계 55개국에 진출해 있다.

로잔=임현석 lhs@donga.com / 신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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