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라인 낮추고 면접 짬짜미… 흙수저 배신한 ‘신의 직장’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30일 03시 00분


기관 946곳 적발, 68곳 수사의뢰

#1 김모 씨는 옛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에서 광물 분야 핵심 과장을 지냈다. 김 씨의 딸은 2010년 산업부 산하 기관인 한국광해관리공단에 계약직에 특채로 입사한 뒤 15개월 만에 정규직이 됐다. 산업부 출신인 김 전 과장은 자신의 딸 김 씨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던 시기 광해관리공단의 이사로 재직 중이었다.

#2 지방공공기관인 서울디자인재단은 원래 채용 첫 단계인 서류전형에 합격자의 15배수를 뽑아야 했다. 그러나 인사 청탁이 들어온 지원자를 뽑기 위해 서류전형에서 합격자의 30배수를 뽑도록 기준을 바꿨다. 그 덕에 당초 서류전형 15배수 안에 들지 못했던 사람이 첫 관문을 통과해 최종 합격했다.

청년들이 ‘신의 직장’이라고 부르는 공공기관 채용과정에서 불법, 탈법, 편법이 공공연하게 이뤄진 것으로 정부 조사 결과 드러났다. 공공기관들은 고위직의 청탁을 받은 특정인을 뽑기 위해 채용요건을 제멋대로 바꿨을 뿐만 아니라 채용 서류를 면접위원에게 미리 넘겨 점수를 높여주기까지 했다. 혈세가 들어간 공공기관 채용시장이 기득권층을 위한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면서 청년들의 상실감이 커지고 있다.


○ 인사청탁부터 점수조작까지

정부가 적발한 4788건의 부정 채용 가운데 83건은 검찰이 수사에 나서야 할 정도로 혐의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수사를 받게 될 공공기관과 공직유관단체가 68곳에 달한다. 한국수출입은행 등 고연봉과 높은 복지 수준으로 사회초년생들이 선망하는 직장부터 세종도시교통공사처럼 신생 공공기관까지 채용비리에 연루된 공공기관은 다양했다. 불법 채용에 대한 확실한 물증을 잡지 못해 연루자를 수사기관에 넘기지는 못한 채 자체 징계를 요구한 기관도 255곳에 이른다.

공공기관 채용비리는 주로 인사청탁→고위임직원의 개입→채용요건 변경→면접위원의 고득점 부여 등의 과정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정치권 등에서 인사청탁이 들어오면 기관의 고위 인사는 실무진에 특정인을 뽑도록 지시하고, 실무진은 채용요건을 바꿔 해당 구직자를 ‘무혈입성’토록 지원하는 방식이다. 공공기관 내부에서 채용비리를 당연시하는 풍토가 뿌리 내린 탓에 채용과정을 문제 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례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인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인사 청탁이 들어오자 고위임원은 면접위원을 내부 인사로만 꾸리도록 지시했다. 이후 청탁 대상 구직자에 대해서만 단독 면접을 진행하는 등 형식적으로 채용을 진행했다. 해당 구직자는 최종 합격했다.

‘자기식구 챙기기’ 식의 채용도 적지 않았다.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은 채용공고를 공단홈페이지에만 게시했다. 내부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뽑기 위해서였다. 이것도 모자라 게시판에 채용공고를 올리는 기간을 멋대로 줄여 다른 구직자들의 기회를 빼앗았다.

채용점수 조작 같은 수위가 높은 범법도 비일비재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지역 유력인사의 자녀를 채용하려고 원래 추가 점수를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 가점을 주지 않고 탈락시킨 뒤 그 자리에 점찍어 둔 사람을 끼워 넣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간부는 아예 청탁을 받은 구직자를 합격시키기 위해 본인이 면접위원으로 참여했다.

○ 15개 부처 산하기관이 ‘비리 백화점’

이 같은 비리는 일부에 국한된 게 아니라 전 부처 산하기관에 퍼져 있는 독버섯이라는 점에서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 채용 비리가 적발된 중앙공공기관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법무부 등 13개부를 비롯해 국무조정실, 관세청 등 15개 부처에 소속돼 있다. 공공기관 평가를 주관하는 기획재정부 산하 기관마저 수사 대상에 올라 있을 정도다.

공공기관이 채용비리에 취약한 건 ‘낙하산 인사’의 핵심 근거지로 인식될 정도로 정치권과 민간부문의 핵심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각 기관장 및 감사 등 주요 임원 자리는 정권 창출에 공이 있는 인사들로 몸살을 앓는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구조적으로 공공기관이 정치권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채용비리도 생겨나는 것”이라며 “채용에서 탈락한 사람도 떨어진 근거를 모두 알 수 있게 하는 투명한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장이 사익을 추구할 수 없게 할 시스템도 필요하다.

정부는 이번 발표를 계기로 채용 비리를 막기 위한 정책을 강화하기로 했다. 채용비리 연루자와 청탁자의 명단을 모두 공개하는 방안이 대표적인 예다. 현재는 수사기관이 대상자를 기소하지 않는 한 실명을 밝힐 수 없다. 정부는 또 채용과정에 대한 투명성을 강화하고 정례적인 검사를 강화하기로 했다.

현재까지 드러난 비리가 빙산의 일각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회성 조치나 명단 공개 정도만으로 공공기관 비리의 뿌리를 뽑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부가 공공기관의 부채 관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정책자원을 투입한 것처럼 인사관리 분야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김준일 jikim@donga.com·최혜령 기자
#공공기관#공공기관 채용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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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추천 많은 댓글

  • 2018-01-30 06:55:52

    이제 사회가 제대로 돼나보다. 사실 이런 건 빙산의 일각이지.

  • 2018-01-30 11:07:38

    그래.... 이건 정말 잘하는것 같다.... 이번에 제대로 썩은살을 다 도려내라 ~~ 앞으로도 어느누구건, 돈과 끗빨로 밀어부치겠다는 놈들은 다 공개하고 집어넣어라. 대한민국이 이제 더이상 미개후진국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 좀 보여줘라 ~~ 말로만 떠벌리지말고 ~~

  • 2018-01-30 13:31:14

    낙하산으로 내려온 기관장이 낙하산으로 직원 뽑는것은 당연 아닌가? 낙하산으로 기관장 보내는 적폐구조를 먼저청산해야 기강이 바로선다는 사실 문씨는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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