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현지 시간) 핀란드 중북부 도시 오울루의 광장. 발트해에 인접한 이곳의 기온은 영하 12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찾아든 어둠 탓인지 바다를 덮고 있는 흰 얼음이 더욱 도드라졌다. 그곳에 지름 2m에 가까운 구멍이 뚫렸다. 바짝 얼어 있는 바다를 비추는 화려한 조명등이 켜지자 빨간 비니를 쓴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이어 창업경연대회 ‘폴라 베어 피칭(Polar Bear Pitching 2018·PBP)’의 막이 올랐다. 2014년 시작된 이 행사는 올해로 5번째를 맞았다. 수영복 위에 가운을 걸친 참가자들은 순서대로 얼음물 속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에스토니아 출신 타치아나 자레츠카야는 “어제 예선 때는 멀쩡했는데, 지금 심박수가 정상보다 두 배 가까운 170까지 치솟았다”고 말했다.
서류전형과 예선을 거쳐 결승에 오른 참가자는 총 12팀. 투자자로 구성된 심사단은 문제의식과 아이디어, 전달력 등을 기준으로 1등을 가린다. 우승자에겐 1만 유로(약 1300만 원) 상금과 ‘중국의 실리콘밸리’인 난징(南京) 견학 기회가 주어진다. 청년창업가들은 얼음물 속에 들어가 1, 2분간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설명한다. 왜 하필이면 가장 추운 2월, 그것도 얼음물에서 경연을 벌이는 것일까.
“2013년 오울루는 얼음물에 빠진 것 같았죠. 선택은 두 가지였어요. 포기하거나, 그 속에서 부활의 기회를 얻거나.”
PBP의 창립자 미아 켐팔라는 노키아가 몰락한 2013년의 상황을 설명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도태된 노키아가 휴대전화 사업부를 매각하면서 이 공장 덕에 먹고살던 오울루도 침체의 늪에 빠졌다. 실업자가 된 고급인력들은 창업 아이디어가 넘쳤지만, 이를 표출할 기회가 마땅치 않았다. 기술교육 전공자인 켐팔라는 고민 끝에 핀란드의 전통놀이 ‘얼음수영’을 생각해냈다. “그래.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정신으로 사업을 알릴 이벤트를 여는 거야!”
켐팔라는 핀란드의 악조건이라 불리는 어둠과 추위를 역으로 활용했다. 꽁꽁 언 발트해에 구멍을 뚫고, 어둠이 일찍 찾아온 그곳에 화려한 조명과 음악을 곁들여 청년창업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색적인 행사에 매료된 젊은 창업가와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심사단 자격으로 온 리쿠 아시카이넨은 “차디찬 얼음물에서 진행되다 보니 참가자들이 꼭 필요한 내용만 간결하게 전한다”며 “(투자자로서) 이 점이 정말 맘에 든다”고 말했다.
이날은 하루 전 파놓은 얼음구멍이 얼어붙어 다시 작업했을 정도로 추웠다. 하지만 행사의 열기는 뜨거웠다. 핀란드 내무부장관 카이 마이카넨은 웃통을 벗고 얼음물에 뛰어들며 흥을 더했다. 기내반입 제한으로 공항검색대에 버려야 했던 물건을 반환하는 서비스 ‘코티오’가 발표됐을 때 청중은 회사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3차원(3D) 방수 깁스를 낀 채로 1분 30초간 설명했던 ‘캐스트프린트’의 창립자 마티스 바브리스도 큰 박수를 받았다.
이들 모두 톱3 수준의 점수를 얻었지만, 승자는 따로 있었다. 농사에 드는 비용과 에너지를 최소화할 수 있는 온실 시스템을 만든 ‘아티선’이다. 그 창업자는 바로 행사에 앞서 심박수를 걱정하던 자레츠카야였다.
악조건마저 기회로 삼는 저력, 추위와 고통을 버티는 힘, 실패에 굴하지 않는 의지…. 핀란드 사람들은 이를 ‘sisu(시수)’라고 부른다. 어떤 말로도 번역되기 힘든 핀란드만의 정신이 담긴 언어다. 행사를 총괄했던 켐팔라 PBP 창립자는 말했다.
“5G(5세대 이동통신) 네트워크 시장에서 다시 부활을 꾀하고 있는 노키아, 어둠과 추위를 활용한 PBP의 성공 등이 모두 시수 정신의 결과물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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