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실물 가치 없다” 비난받는 가상통화… 달러에는 실체가 있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12일 03시 00분


집에서는 아빠인 남성, 회사서는 과장으로 근무
현실에 함께 살면서도 각기 다른 가상의 역할 있어
법정 화폐는 실물 아닌 가상… 美정부가 보증하는 달러화도 금융위기때처럼 무너질 수 있어

프랑스 파리의 유명 건축물 그랑팔레. 이곳에 스위스 출신 유명 화가인 펠리체 바리니(65)가 작품을 설치했다(사진). 빨간색 페인트로 건물 기둥과 바닥 전체에 동그란 무늬 수십 개를 덧입혔다. 소중한 문화유산에 아무 생각 없이 페인트칠을 했을 리 만무하다. 그는 이미지를 투사해 3차원의 ‘가상 이미지’를 구현했다.

단, 이 이미지를 보기 위해선 조건이 있다. 작가가 지정한 높이와 지점에서만 완전한 3차원의 이미지를 경험할 수 있다. 조금만 각도나 거리가 빗나가도 이미지는 어그러져버린다. 사람들은 이 작품이 진짜가 아닌 가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즐긴다. 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기꺼이 자리를 옮겨 다니며 자신의 눈높이와 거리를 조절한다.

최근 가상이라는 말이 어느 때보다 흔해졌다.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가상통화)의 등장 때문이다. 베르니의 작품을 마주한 관객처럼, 사람들은 가상통화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열광한다. 특히 한국은 주요 외신에서도 주목할 만큼 가상통화 투자(아니 투기) 열풍이 거세다.

정부는 이 가상통화 열기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 가상통화에는 내재적 가치, 즉 실체적 가치가 없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 존재하는 법정통화와 달리 화폐로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가상통화의 거품이 걷힐 경우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볼 것이라고 예측한다. 한때 우리나라를 휩쓸고 간 ‘바다이야기’ 같은 사행성 도박이라고 여긴다.

정말 그럴까? 가상통화에 대한 정부의 원칙에는 지나칠 수 없는 모순이 숨어 있다. 가상통화가 실재적 가치가 없다고 비난하는 것은 거꾸로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법정통화에는 실재적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법정통화의 내재적 가치도 실체가 없다. 달러의 내재적 가치는 미국 정부가 보증했기 때문에, 원화의 가치는 한국 정부가 보증했기 때문에 부여된 것일 뿐이다. 금에 연동해 화폐 가치를 매겼던 브레턴우즈 체제는 1970년 붕괴됐다. 사람들은 화폐의 가치를 믿지 못하고 부동산이나 금 같은 실물가치에 투자하기도 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이 같은 가상과 현실의 구분은 착시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디즈니랜드에 들어가 만화 캐릭터와 디즈니 시리즈물로 구성된 가상의 공간을 마음껏 즐긴다. 그리고 디즈니랜드를 떠나는 순간 현실의 공간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또한 가상의 연장선이다. 가정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을 해야 하고, 회사에 출근해 과장이나 대리의 역할로 분해야 한다. 디즈니랜드는 디즈니랜드 밖 또 다른 가상세계를 현실세계로 느끼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한 셈이다.

가상통화도 마찬가지다. 법정통화 제도는 현실의 가상적 성격을 은폐해 가상통화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지닐 수 있다. 2008년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를 생각해 보자. 미국 중산층은 실물에 근거하지 않은 통화 확대 정책, 연쇄적 투자로 부동산 가치에 거품만 끼게 한 모기지 정책 등으로 인해 부에 대한 환상을 품었다. 이 환상의 근간이 바로 법정통화 제도다. 가상통화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아마도 가상통화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화폐제도가 지닌 위험한 가상성이 아닐까.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imago1031@hanmail.net
정리=이미영 기자 mylee03@donga.com
#가상통화#달러#금융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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