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서먹해진 정부-재계단체… 통상전쟁 대응도 제각각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8일 03시 00분


‘대기업 패싱’에 협력 시스템 무너져


글로벌 통상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한국 정부와 기업, 재계단체 사이에 유기적 협력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이후 이어져 온 ‘대기업 패싱’ 분위기가 통상 분쟁 이슈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등 민간 경제단체들이 오랜 기간 구축해 온 미국 정재계 네트워크마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금까지 미국 재계와의 소통은 대체로 주요 대기업 경제단체인 전경련 등을 통해 이뤄져 왔다. 하지만 국정 농단 사태로 전경련이 코너에 몰린 뒤로 이 역할을 대체할 다른 대안을 찾거나 기존 채널은 보완하지 못한 채 국익을 위한 협력에만 금이 갔다.

실제 지난해 10월 열린 전경련 주최 한미재계회의에도 2006년 이후 처음으로 장관급 이상 정부 측 고위 관계자가 참석하지 않았다. 그동안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비롯해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 등 장관급 이상 고위 관계자들이 관례적으로 참석해 왔다. 지난달에도 전경련은 미국 워싱턴에 SK와 현대차, 한화 등 국내 주요 투자 기업 임원들로 구성된 투자대표단을 파견했다. 이들은 윌버 로스 상무장관을 비롯한 미 상무부, 의회 인사 등과 함께 미국 주(州) 협의회 주최 만찬에 참석해 최근 양국 간 통상 이슈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지만 이 자리에도 정부 고위 관계자는 없었다. 전경련이 최근 허창수 회장 명의로 미국 의회와 행정부 백악관 등의 유력 인사 565명에게 서한을 보낸 과정에서도 정부와 사전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무역협회도 4월 중 회장단이 직접 미국을 찾아 의원 및 정부 인사, 재계 싱크탱크를 방문하고 통상 분쟁에 대한 한국 재계의 우려를 설명할 계획이지만 이 역시 정부와는 별개로 준비하고 있다. 장관급 이상 정부 측 고위 관계자는 일정 등의 문제로 참석할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전해졌다.

현 정부가 전경련 역할을 대한상의로 대체하려 하지만 전경련에 비해 대한상의의 해외 네트워크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데다 미국 측과 급이 안 맞는 경우가 많다. 대한상의 출신의 한 관계자는 “외국에선 대한상의가 대기업이 아니라 중견·중소기업을 대표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대기업 간 대화 채널로 인정받기 쉽지 않다”고 전했다. 국내 대기업의 글로벌 대관 관계자는 “지금 같은 전쟁 상황에선 갖고 있는 자원을 다 활용해도 모자랄 판인데 내부 이슈에 발목이 잡힌 느낌”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재계 단체의 엇박자 속에 기업들은 각자도생하는 분위기다. 미국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여러 대안을 검토하고 있다.

대기업 관계자는 “미국 정권 교체 후 정부 대응과는 관련 없이 이미 통상 문제와 관련한 여러 시나리오를 만들어 뒀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인 요구에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결국 미국에 가전 공장을 새로 지었듯 결국 TV나 철강도 미국 정부가 정해주는 새로운 시장 원칙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업체들에 주어진 선택권이 미국 시장을 포기하거나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미국에 공장을 새로 짓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견기업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LG전자 정도의 대기업은 트럼프가 요구하는 대로 공장을 새로 지을 여유라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중견·중소기업들은 막막할 따름”이라고 했다.

대관 업무를 담당하는 대기업 임원은 “기업이 입는 피해가 곧 국민이 입는 피해인데 여전한 반(反)기업정서 때문인지 기업을 국민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통상전쟁#대기업 패싱#정부#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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