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조선의 청산은 지진보다 무섭다. 정부와 통영시는 생존권을 보장해라.’(경남 통영시 안정국가산업단지 성동조선해양 정문 앞 도로 현수막) “아침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문을 열어 놓지만 한 달 임차료 100만 원 벌기도 힘들어 올해 초엔 아르바이트생도 내보냈다.”(전북 군산시 한국GM 공장 인근 편의점주 하소연)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를 견인해온 ‘특급 엔진’이었던 코스트(해안)벨트 지역 주력 업종들이 산업 구조 조정기를 맞아 진통을 겪고 있다. 미국의 ‘러스트벨트(Rust Belt·오하이오주와 펜실베이니아주 등 미 북부와 중서부 지역 제조업이 경쟁력이 떨어져 쇠락한 것을 표현)’에 빗대 ‘해안벨트’가 한국판 러스트벨트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전북 군산의 한국GM 자동차 공장 철수 논란과 경남 통영의 성동조선해양 법정관리, 거제의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의 수주 절벽 등은 두드러진 몇 사례에 불과하다. 인천, 충남 당진, 전남 영암, 전남 광양·여수, 부산, 울산, 경북 포항 등 연해지역에 위치한 중후장대형 산업단지 곳곳에서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 해안벨트에서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군산과 통영·거제 등을 찾아 실태를 들여다보고 원인과 해법을 모색해본다.》
코스트(해안)벨트는 그동안 한국 경제의 ‘성장엔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들 지역이 휘청거리고 있다. 세계 경기 침체와 주기적인 시황 악화, 중국 등 후발국의 추격,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산업 유형의 변화 등 이른바 ‘산업의 기후변화’가 원인이다. 수년 전부터 예견된 변화였지만 호황에 취해 변신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 ‘조선소에 골리앗만 멀뚱히 서 있어’
14일 낮 12시경 전북 군산시 소룡동 한국GM 공장 앞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넓은 직원 주차장에 차량 20여 대가 서 있고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난해 7월부터 가동을 중단한 인근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에는 출입하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 25만 t급 선박 4척을 동시에 건조할 수 있다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독(dock)은 텅 비어 있었다.
군산조선소 가동 중단과 군산공장 폐쇄로 직격탄을 맞은 곳은 군산조선소와 한국GM 군산공장 인근 상가 지역인 오식도동 일대. 상가와 원룸, 상업시설 곳곳에 임대, 매매 문구를 써 붙여 놓았지만 거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근에 위치한 부동산중개업소 대표 강광훈 씨(44)는 “조선소 직원들이 주로 이용하던 원룸 임대료는 7평 1인실 기준 25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떨어졌고 500여 채 가운데 절반이 공실”이라며 “그나마 찾는 사람도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14일 오전 10시 경남 통영시 안정산단 내 성동조선해양. 한때 성동조선과 내부 협력업체 근로자 등 9000여 명이 근무해 북적였던 조선소 3개 야드는 100m 높이의 골리앗 5대만이 멀뚱히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배운용 총무홍보파트 차장은 “세계 최초의 ‘육상 건조’ 기술을 보유하고 잘나갈 때는 한 해에 40척의 배를 건조하던 곳”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성동조선해양 인근에 위치한 편의점에는 ‘오후 3시 문 열고, 오후 7시에 문 닫습니다. 양해 바랍니다’는 게시문이 붙어 있었다. 통영 인근 거제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고현동 중앙로 인근에 위치한 한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는 “불과 2, 3년 만에 아파트 가격이 20% 이상 떨어지고 방 구하기가 어려웠던 원룸 공실률이 25%로 치솟았다”고 귀띔했다. 이어 “과거 수주 물량이 넘쳐 추석과 설날에도 쉬지 않고 조업했던 때와 비교하면 상전벽해”라고 덧붙였다.
○ 특정 업종 편중이 부른 부메랑
거제는 국내 두 번째 크기의 섬으로 6·25전쟁 당시 피란민이 몰려들고 전쟁 후 포로수용소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560m 거리의 바다를 노를 저어 오간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다. 김의부 거제 향토사연구소장은 “물건을 팔아 돈을 번다는 것도 모르는, 육지와는 고립된 지역이었다”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1971년 구 거제대교가 건설돼 육지와 연결되고 1979년과 1981년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세계적인 선박 건조의 메카로 변신했다.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위한 전진기지로 개발됐던 군산은 1980년 외항 건설, 1994년 군산국가산업단지 완공, 1997년 대우자동차(현 한국GM) 군산공장 가동 등의 호재가 잇따르면서 날개를 펼쳤다. 당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부평공장 터로는 생산 능력 확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군산공장 투자를 결정했다.
이 같은 해안벨트에 2, 3년 전부터 본격적인 찬바람이 불어왔다.
거제는 2016년 이른바 ‘수주 절벽’으로 조선업 불황의 한파가 지속되면서 조선에만 목을 맨 것이 발목을 잡았다. ‘거제 조선업희망센터’에 따르면 조선업에서 이탈한 뒤 실업급여를 받는 기간(퇴사 후 3∼8개월) 다시 일자리를 구한 사람은 약 30%. 이 가운데 90%가량은 조선업이었다. 조건은 열악해도 유사한 업종으로 간다는 뜻이다.
군산은 제조업 근로자 2만6000여 명 가운데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와 한국GM 군산공장 근로자가 1만2000여 명으로 절반가량 된다. 두 회사가 잇따라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역경제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포스코 제철소가 있는 경북 포항과 전남 광양, 현대제철 제철소가 있는 충남 당진은 보호무역주의 확산으로 철강제품 수출이 감소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현재 글로벌 철강 경기가 나쁘지 않아 당장 어려움을 겪지는 않겠지만 미국이 한국산 철강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면 생산 차질이 불가피하다. 여기에다 일본 정부도 한국산 철강 제품에 최대 70%가량의 관세를 매기겠다는 방침을 내놓고 있어 해당 도시들이 긴장하고 있다.
울산도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등 조선업체들 때문에 부분적으로 지역경기가 위축됐지만 자동차나 정유 및 석유화학업체들이 건재해 다른 해안 도시들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하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등으로 대미(對美) 수출 환경이 악화되면 현대자동차가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변해야 산다”
산업연구원(KIET)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한국 주력산업의 미래 비전과 발전전략’ 보고서는 선진국에 치이고 후발국에 쫓기는 한국의 주력 산업으로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기계 등을 들었다. 바로 해안벨트에 들어선 업종들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기준 국내 기업의 업종별 경쟁력지수를 100으로 보고 선진국과 후발국의 경쟁력을 비교한 결과 자동차는 선진국 106.3, 후발국 94.4로 분석됐다. 석유화학은 선진국 102.9, 후발국 97.9로 추정됐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2025년 국내 주력 산업의 생산량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시장 점유율도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보고서는 한국 주력 산업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네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생산성 향상과 규제 등 생산 여건 개선을 통한 국내 생산 확대 △글로벌 가치사슬에서의 새로운 역할 모색 △신제품과 신산업을 중심으로 한 주력산업 변화 유도 △서비스 등 관련 산업으로의 사업 범위 확대다.
홍성인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후발 개발도상국의 추격으로 산업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만큼 한국 기업이나 도시들도 변신에 나서야 한다”며 “다만 한국은 스웨덴 말뫼처럼 경쟁력이 아예 없어진 상황은 아니어서 산업구조 개편과 함께 기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을 함께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경남발전연구원 경제산업연구실의 김도형 연구원은 “전혀 새로운 업종으로의 전환이 쉽지 않다”며 “거제의 경우 친환경 고부가가치 선박을 건조하면서 다시 도약할 기회를 기다려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거제시 경제계의 한 관계자는 “통영이나 거제 모두 조선업 호황이 꺼질 수도 있다는 경고음이 수년 전부터 켜졌지만 관련 기업은 물론이고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도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며 “이제라도 기업과 정부가 힘을 합쳐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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