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당 최대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단축되면 근로자가 초과 근로시간을 모아뒀다가 휴가로 보상받는 ‘저축휴가제’를 도입하는 기업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저축휴가제를 잘만 활용하면 해외로 휴가를 떠날 수도 있다. 독일은 초과근로를 연 250시간(약 31일)까지 모을 수 있는 제도를 10년째 시행 중이다. 동아일보DB
롯데백화점 재무팀에서 일하는 이경민 대리(30·여)는 새 분기가 시작되면 정신이 없다. 이전 분기 실적을 정리하는 업무가 산처럼 쌓이기 때문이다. 반면 분기 말이 되면 손이 빈다. 이 대리는 지난해 야근으로 쌓인 연장 근로시간 16시간에 가산시간 8시간을 합쳐 분기 말에 사흘 치(24시간) 휴가로 바꿔 썼다. 이른바 ‘저축휴가제’다. 이 대리는 “바쁠 때 바짝 야근하고 덜 바쁠 때 휴가를 쓰니 더 여유로운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 근로자 10명 중 4명 “저축휴가 몰라요”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저축휴가제를 도입한 뒤 이달 4일까지 총 283명이 이 제도를 이용했다고 밝혔다. 롯데는 올해 주요 계열사 43곳에 이 제도를 확대할 계획이다.
7월부터 근로시간 단축안이 시행되면 롯데처럼 저축휴가제를 도입하는 기업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개정 근로기준법에 따라 근로자에게 주당 52시간을 초과해 일을 시킨 사업주는 처벌 대상이기 때문이다. 근로자가 불가피하게 특정 시기에 일을 몰아서 하게 되면 그만큼 휴식을 보장해주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해진 것이다.
저축휴가제의 법적인 이름은 보상휴가제다. 근로기준법 제57조에 “연장·야간·휴일근로에 대해 임금 지급을 대신해 주는 휴가”로 규정돼 있다. 말 그대로 정해진 시간보다 오래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이니 휴식시간도 연장 근로시간의 1.5배로 가산하는 게 원칙이다. 유급휴일(일요일)에 8시간 일했다면 나중에 쓸 수 있는 휴가는 12시간이 적립되는 방식이다.
선진국에선 오래전부터 시행 중이다. 독일이 2009년 도입한 근로시간계좌제는 근로자가 정해진 것보다 오래 일한 시간만큼 적립했다가 원할 때 휴가로 쓸 수 있는 제도다. 연 최대 250시간(약 31일)을 적립할 수 있고, 이를 넘기면 나중에 안식휴가(3∼12개월)로 쓸 수 있다. 네덜란드의 생애저축제도도 비슷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근로기준법에 보상휴가제가 명시된 지 15년이나 지나도록 이 제도를 생소하게 여기는 근로자가 많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6년 12월 국내 업체 1570곳을 조사해 보니 저축(보상)휴가제를 안다는 응답은 절반이 조금 넘는 908곳(57.8%)에 그쳤다. 특히 영세(5∼29인)업체의 인지율은 50.7%로 대기업(300인 이상)의 76.5%보다 크게 떨어졌다. 보상휴가제를 실시하고 있는 업체도 전체 평균 9.2%에 불과했다.
많은 근로자들에겐 저축휴가보다는 대체휴일(대휴)이 더 익숙하다. 대휴는 노사가 미리 정한 바에 따라 근로자가 유급휴일에 일했다면 다른 날 하루 쉬는 제도로, 휴식시간이 가산되지 않는다. 일요일에 8시간 일했다면 다른 요일에 8시간 쉬는 것으로 끝이다. 현행법엔 없지만 대법원 판례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회사가 근로자와 미리 약속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일요일 출근을 요구했다면 이는 ‘사후대휴’에 해당되기 때문에 1.5배 가산을 적용하는 것이 옳다는 게 노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지난달 정부와 여당은 사후대휴에 ‘1.5배 가산’ 원칙을 근로기준법에 명기하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재계의 반대 등으로 근로시간 단축안에는 결국 반영되지 않았다.
문제는 근로 현장에서 사후대휴와 미리 합의된 대휴의 개념이 뒤섞여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점이다. 한 잡지사에서 6년간 디자이너로 일한 B 씨는 “일요일에 갑자기 회사로 불려가 밤 11시까지 일했지만 ‘평일 중 하루 쉬라’는 말만 들었다”고 말했다. 수당이나 휴식시간을 1.5배로 받아야 하지만 근로자가 이를 일일이 따지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근로자가 연차휴가를 냈는데 회사가 임의로 대휴로 수정해 처리한 경우도 있었다. 이 회사에선 근로자가 연차를 다 쓰지 못해도 보상금을 줄 필요가 없지만 대휴를 쓰지 않으면 초과 근로수당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꼭 근로시간 단축이 아니더라도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면 유연근무제는 확산될 수밖에 없다”며 “주먹구구식 사후대휴보다는 체계적인 저축휴가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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