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기술기업 ‘디코’를 창업해 운영 중인 박세빈 대표가 지난달 27일 서울 용산구 서울글로벌창업센터에 있는 사무실 ‘오픈 스페이스’에서 직원들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박 대표는 “엔턴십을 활성화할 수 있는 취업 지원 정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양회성기자 yohan@donga.com
“신규 창업자에 대한 지원은 많은데 3년 이상만 되도 지원책을 찾기 어렵다.”(창업 4년차 업체 대표)
‘청년들에게 창업기회를 주기 위해 조성된 점포에 청년 부모가 대리 경영을 하고 있다.’(지난해 말 국민권익위원회 접수 민원)
동아일보 청년드림센터와 일자리TF가 창업 실태를 취재한 결과 창업 이후 자금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자금지원이 대폭 줄어드는데다 지원제도가 편법으로 악용되면서 청년 창업가를 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창업 전이나 사업 초기 단계에 집중돼 있는 자금 지원을 3~7년 차 창업기업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와 함께 청년들이 지원받을 수 있도록 창업주에 대한 조사를 통해 허위 창업을 근절해야 한다.
●‘죽음의 계곡’에 빠진 청년창업가
국제연구기관 ‘글로벌 기업가정신 모니터(GEM)’에 따르면 25~34세인 한국 청년들이 창업한 기업이 우리나라 전체 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7%로 조사 대상 64개국 가운데 62위였다. 중앙과 지방정부가 운영 중인 창업 지원제도가 800여 개에 이르지만 ‘창업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3년 전 교육기술기업 ‘디코’를 창업한 박세빈 대표(28·건국대 경영학과 4학년)는 자금 문제를 원인으로 들었다. 그는 중소기업진흥공단의 ‘청년창업사관학교’를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청년창업사관학교 제도를 이용하면 총 7000만 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창업자가 자기 힘으로 3000만 원을 조달해서 총 1억 원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는 점이 문제였다. 지원금만 챙기는 부작용을 막으려는 안전판이지만 청년들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다. 박 대표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금을 조달하는 등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그는 “낮은 이자로 빌려주는 방식을 도입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교육기술기업 ‘디코’를 창업해 운영 중인 박세빈 대표가 지난달 27일 서울 용산구 서울글로벌창업센터에 있는 사무실 ‘오픈 스페이스’에서 직원들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양회성기자 yohan@donga.com ‘죽음의 계곡’으로 불리는 3~7년 차 창업기업들은 더 심각한 자금난에 빠져 있다. 창업기업들이 생존을 위한 가장 큰 고비를 맞는 기간을 뜻한다. 이 시기에 은행들은 담보를 요구하며 대출을 꺼리고 벤처투자사는 예비 창업자에만 눈독을 들이기 때문이다. 2016년 기준 예비 창업자와 3년이 안 되는 기업에 대한 지원금은 5000억 원에 이르지만 3~7년차 기업들을 위한 지원은 1000억 원도 안 된다. 실제 정부 지원으로 조성된 서울 서대문구 ‘이대앞 스타트업 상점가’에는 2016년 22개의 점포가 문을 열었지만 현재는 12곳이 폐업하거나 이전했다.
●청년 위한 점포에 부모가 대리창업
취재 과정에서 소문만 무성하던 부모의 ‘대리 창업’도 사실로 확인됐다. 전북 군산시는 중소벤처기업부와 공동으로 총 13억5000만 원을 들여 작년 7월 군산 공설시장에 ‘청년몰 물랑루즈 201’라는 창업공간을 조성했다. 만 39세 이하 청년들을 위한 점포였다.
정작 청년몰이 문을 열자 20개 점포 중 2개 점포에서 나이가 지긋한 장년층이 장사를 시작했다. 서류상 사장은 청년이었지만 실제 사업주는 청년의 부모나 장모였다. 군산시 관계자는 “다음달 중 해당 점포를 비우게 하는 행정조치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전 동구 대전중앙시장의 청년몰인 ‘청년구단’에서 전통주점을 창업한 박유덕 ‘주로’ 대표(29)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청년몰 사업의 허점을 악용해 창업자들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있다”며 문제가 생기면 즉시 계약을 해지하는 등 사후 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망해도 재도전 가능한 안전망 구축해야
일부 창업기업이 지원요건만 잘 맞춰 전국을 돌아다니며 정책자금을 전문적으로 챙기는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식품벤처업을 하는 A 씨는 “초기 창업 투자 중심으로 지원이 이뤄지면서 기존사업을 심화하기보다는 문어발식으로 새로운 사업을 계속 벌이고 있다”고 귀띔했다. 부처들이 유사한 사업을 중복해서 추진하면서 눈먼 돈이 늘었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창업기업이 인턴을 채용하면 정부가 일반 기업과 마찬가지로 지원금 등의 혜택을 주는 제도를 도입하자고 건의했다. 인턴 청년은 창업 경험을 얻고 창업 기업은 인력난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정부는 상시 근로자 5인 이상인 기업 인턴만 지원해주고 있다. 문유진 복지국가청년네트워크 대표는 “창업 지원 체계를 세분화해서 지원하되, 자금이 필요한 단계에 효율적으로 지원하고 망하더라도 재도전할 수 있는 안전망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 ‘놀이마당’ 없는 한국…반면 창업 선진국에선 ▼
과거 김대중 정부는 ‘신지식인’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청년 창업을 장려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이를 두고 청년들이 마음껏 아이디어를 펼치는 ‘놀이마당’을 만들려는 취지였지만 흐지부지됐다고 자신의 저서 ‘경제는 정치다’에서 밝혔다.
지금 한국에는 놀이마당이 없는 반면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는 그 영역이 점점 커지고 있다. 창업 선진국과 후진국을 나누는 경계가 바로 이 놀이마당인 셈이다.
지난해 5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취임 직후 “스타트업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창업을 경제 개혁의 원동력으로 삼은 셈이다. 마크롱의 첫 작품은 파리에 세계 최대 규모의 스타트업센터를 설치한 것이었다. 해외 창업자에게는 4년 간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발급한 데다 13조 원 규모의 펀드 조성 계획까지 내놨다. 오래지 않아 50개국에서 2만3000개의 기업이 몰려들었다. 로봇기업 ‘H3 다이내믹스’ 등 해외로 떠났던 자국 기업의 ‘유턴’도 이어졌다. 청년 실업으로 침체됐던 파리는 현재 ‘창업의 도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0년 런던에 ‘테크시티’를 조성한 영국은 유럽 최고의 ‘창업국가’로 통한다. 창업자는 15파운드(약 2만2000원)만 내면 2일만에 법인등기서류를 받을 수 있다. 영국 정부는 규제를 완화해 폐업에 따른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성장가능성이 입증된 50개의 스타트업을 추려 집중 육성했다. 그 덕에 테크시티의 입주기업은 5000여개까지 늘었다. 이곳에서 런던 일자리의 27%가 만들어지고 있다. 영국 내 정보기술(IT) 기업이 2012부터 5년 동안 유치한 투자금액은 138억 달러(약 15조 원)로 유럽에서 가장 많다.
중국도 창업선진국의 반열에 들었다.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2015년 3월 “창업과 혁신 관련 행정규제를 철폐해 인민의 창조력 발휘를 지원 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하루 평균 1만5000개의 기업이 생기고 있다. 취업 대신 창업을 선택하는 청년들이 급증하면서 ‘취업창업’이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이장균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일자리를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저절로 생기도록 유도하는 창업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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