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스캔들에도…아베 ‘정치 생명’ 유지하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2일 17시 08분


사진 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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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여러 면에서 여타 선진국과 동떨어진 갈라파고스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최근의 아베노믹스만큼은 놀라운 진화 능력을 자랑한다. 잘 알려진 대로 아베노믹스에는 세 개의 화살에 비유되는 세 가지 정책 처방이 있다. 처음 두 개의 화살도 경제 여건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지만, 가장 놀랍게 진화하고 있는 것은 세 번째 화살인 장기성장전략이다. 사실 2013년 초 아베노믹스의 정책 내용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장기성장전략에 대한 평가가 조롱 일색이었다. 구체적 내용이 없는 데다가 정책의 방향성마저 모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년 진화를 거듭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이 첨가됐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일본경제의 장단점과 경쟁력을 분석하더니 첨단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로드맵이 제시됐다. 일본을 관광 대국으로 만들겠다며 면세점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고 비자 요건을 완화하더니 외국인 관광객 1000만 명 유치라는 목표를 조기에 달성했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역설하더니 격무에 시달리던 젊은 회사원의 자살을 계기로 더욱 강하게 기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임금상승 없이는 구매력이 살아나지 않고 따라서 기업에도 결국 손해가 된다는 논리로 임금 인상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다. 아베는 정권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체감 경기의 개선과 미래에 대한 장기 비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일본경제의 부흥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면 과거 자민당의 노선이나 이념과 배치되는 정책이라도 채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최근 각종 스캔들로 국민의 신뢰를 잃었으면서도 아직 정치 생명을 유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반면 한국에는 경제 문제를 둘러싸고 진화하지 않는 여러 개의 갈라파고스가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구미의 주류 경제학계조차 기업의 목적이 이윤추구라는 오래된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가 극히 빈약하다. 일본 정치계가 임금 인상의 필요성을 역설할 때 기업가 단체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식으로 화답했다. 한국에서는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를 지적하는 외침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대기업 단체로부터 그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중소기업의 취약성이 청년실업을 비롯한 대부분 경제 문제의 근원이건만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대기업들은 중소기업 지원에 여전히 인색하다. 일부 대기업 노조의 이기심과 폭력성 때문에 노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확산되고 있지만, 대기업 노조가 사회적 책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전조는 보이지 않는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노조는 노조대로 힘들다며, 그들은 체감 실업률이 20%를 넘는 청년실업자들을 위해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고 한다.

한국의 갈라파고스 거주자들은 환경이 변해도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한다. 현안을 토론할 때 모든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테이블에 올려놓지 않는다. 주장과 신념이 먼저 자리를 잡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데이터를 선별하여 제시한다.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따른 노동시간 단축을 코앞에 두고, 노동시간 단축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언론에 가득하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과 같은 경제 수준에 도달했을 때 한국만큼 장시간 노동을 요구한 국가를 나는 어느 데이터에서도 본 적이 없다.

반면 최저임금 문제에서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저소득 근로자의 일자리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뒷받침하는 외국의 사례가 존재한다. 완전고용 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최저임금은 아직 한국 돈으로 1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 최저임금정책의 목적이 저소득층의 소득개선이라면 지금의 경제환경에서 정책이 어떻게 진화해야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지금의 환경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외부와 격리된 갈라파고스의 생명체는 진화하지 않아도 도태되지 않는다. 진화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므로 환경이 변화하지 않는 한 진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 살면서 자신을 갈라파고스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진화를 거부하는 생명체가 있다면 종족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환경에 적응하여 진화하는 경쟁자들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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