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멈추는 정기 시설점검, 숙련자가 해도 주 60시간 훌쩍”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7일 03시 00분


[주52시간 태풍이 온다]<6>난감한 정유화학업계

정유업체 A사에선 하반기(7∼12월)에 예정된 원유정제 처리시설 보수를 앞두고 비상이 걸렸다. 다음 달부터 시행되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도저히 맞추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다.

정유화학사 같은 대형 장치산업에서는 365일 24시간 가동되는 설비의 안전과 효율을 위해 통상 4년에 한 번씩 대대적인 보수를 실시한다. 원료를 제거한 뒤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탱크 안을 직접 살펴보거나 파이프 등을 분해해 노후되거나 불량이 없는지 교체할 부분을 점검한다. 공장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로 꼽힌다.

A사가 지난해 5월 다른 공장의 정기 보수를 할 때 꼬박 34일이 걸렸다. 보수를 하기 전 공장 가동을 완전히 멈추는 셧다운과 정비 후 기계를 다시 돌리는 재시동에만 각각 7일 넘게 소요된다. 작은 실수라도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작업이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없다. 작업시간을 연장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숙련된 근로자들이 하루 12시간씩 맞교대로 작업을 수행했다. 지난해 5월 정기보수 현장에 이렇게 투입된 직원 35명의 평균 주당 근로시간은 84시간에 달한다. 탄력적 근로제를 도입한다 해도 주당 근무 64시간을 넘길 수 없기 때문에 법을 어기게 된다.

결국 A사가 주 52시간 도입 후 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근무 조를 더 투입해야 한다. 최대 주당 64시간밖에 작업할 수 없다. 추가 인력을 뽑아 근무 시간을 채운다는 전제로 단순 계산해 보면 35명이 하던 일을 약 45명이 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고난도 작업을 수행할 숙련된 근로자 풀이 많지 않아 추가 채용이 어렵다. 주당 64시간씩 일했다면 한 주에 12시간씩 추가로 일한 것이 되기 때문에 탄력적 근로시간제에 따라 나머지 기간 동안 이만큼 일을 덜해야 한다.

이 회사 관계자는 “기존 근로자 중에서도 숙련도 높은 근로자만 이 작업에 참여할 수 있어서 일이 쏠리는 실정”이라며 “미숙련공 몇 명을 더 뽑아 일을 나눈다는 것은 현장을 전혀 모르고 하는 얘기”라고 말했다.

같은 정유회사인 B사는 A사에 비해 준비를 많이 한 편이지만 고민은 여전했다. 이 회사는 업계 처음으로 노사가 3개월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합의했다. 하지만 B사 역시 숙련 근로자 풀이 제한된 탓에 인력을 늘리기 쉽지 않고 충원을 한다고 해도 보수 기간이 끝나면 잉여인력이 될 가능성이 커 인력 운영 방안을 확정하지 못했다. B사 관계자는 “단축된 근로시간을 맞추느라 안전점검이 지연되면 근로자의 안전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며 “법을 지키려고 굉장히 애쓰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3, 4년마다 범법자가 될 처지”라고 우려했다.

업계는 대보수 기간 동안 특례를 인정해주거나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 기간을 1년으로 늘려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 미국 일본 프랑스 핀란드 등 선진국은 이미 단위 기간을 1년으로 운영하고 있다. 대보수 기간을 법정 인가연장근로로 인정해주는 방법도 있다. 인가연장근로는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를 얻어 주 52시간을 초과해 근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현재는 자연재해나 중대 사고가 발생한 경우에만 허용된다.

정유업체들의 경쟁력도 위협받을 것으로 보인다. 설비를 가동하지 않으면 하루에 수백억 원씩 손실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안전하게 정비를 마치고 기계를 돌리는 게 핵심 경쟁력인데 근로시간을 억지로 맞추느라 스스로 ‘점검 속도’를 포기해야 하는 형국이다. 공장 유지 보수를 업으로 하는 플랜트 업체들의 고민은 훨씬 더 심각하다. 이 협력 업체들은 한 공장의 보수가 끝나면 다른 공장으로 옮겨 지원하는 시스템인데 주 52시간 일정으로 진행할 경우 공사 일정 지연으로 공사비용이 늘고 국내외 신규 사업 수주에도 제동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플랜트업체 C사 대표는 “정기보수 작업은 숙련공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수작업으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수인계가 반복될수록 작업 능률이 70∼80%로 떨어지는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근로시간을 줄이기 위해 추가 채용을 할 경우 기존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인건비를 줄여야 하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다. 석유화학업체 C사는 최근 노동조합 측으로부터 황당한 요구를 받았다. 근무 조를 더 늘리는 만큼 대체근무로 인한 추가수당을 받을 기회가 감소하니 기본급을 올려서 보전해 달라는 취지였다. C사 관계자는 “탄력근로시간제 단위 기간을 연장하려면 노사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노조 측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
#정유화학업계#정기 시설점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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