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 난 딸을 키우고 있는 김호현 씨(39)는 얼마 전 딸의 질문에 놀랐다. 유치원 친구들이 ‘파란색은 남자 색깔이니 여자는 분홍색만 쓰라’고 해 작은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김 씨는 “물건을 파는 업체들은 물론 부모들까지 은연중에 아이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색상과 특성에 따라 남아용과 여아용을 구분한 제품은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객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마케팅 차원에서 일부 제품은 성별을 구분하고 있다는 게 유통업계의 설명이지만, 자칫 성 고정관념을 고착화할 수 있어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27일 찾은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의 장난감 전문 매장 ‘토이저러스’. 파란색으로 칠해진 매장 한쪽 벽면에 ‘남자아이 장난감’이라는 글씨가 크게 적혀 있었다. 이 코너에 있는 장난감은 자동차, 기차, 비행기 등 교통수단과 직접 조립해서 만들 수 있는 과학 기술 건축물 등이었다. 여자아이 장난감 코너는 따로 없었지만 남아용 매대 바로 옆에 시크릿쥬쥬, 미미, 바비 등 인형과 엄마놀이 세트 등을 모아놓은 분홍색 매대가 있었다.
토이저러스는 온라인몰에도 여아용과 남아용 장난감을 구분해 뒀다. ‘여아 Toys’ 카테고리에는 인형, 꾸미기 등의 장난감이, ‘남아 Toys’ 카테고리에는 액션, 조종, 자동차·기차, 프라모델·피규어 등이 있었다. 온라인몰인 G마켓에서도 ‘왕자님’과 ‘공주님’으로 성별을 구분해 장난감 ‘럭키박스’를 팔고 있다. ‘왕자님’ 박스에는 경찰관·소방관 모자, 기차놀이 등이, ‘공주님’ 박스에는 귀걸이와 팔찌, 옷 입히기 세트와 핸드백 등이 들어있다. 내부에 장난감이 들어있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초콜릿 ‘킨더조이’는 포장부터 ‘남아용’과 ‘여아용’을 구분하고 있다. 파란색 껍데기에 싸인 남아용 안에는 광선검을 들고 있는 영화 ‘스타워즈’의 영웅들이, 분홍색 껍데기에 싸인 여아용 안에는 왕자님과 춤을 추고 있는 디즈니의 공주 캐릭터 인형이 들어있다.
남아용과 여아용을 구분하는 게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우려가 일자 아마존과 디즈니, 타깃 등 미국의 유통업체들은 2016년 성별 표지를 없앴다. 영국 내 주요 완구·유통업체도 완구점 매장에서 남아·여아용 구분을 없앴다.
2017년 국제 학술지 ‘성역할저널’은 여자아이들에게 ‘레고’의 파란색 블록과 분홍색 블록을 가지고 놀게 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아이들은 분홍색 블록을 가지고 놀 때 인형이나 메이크업 등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스러운’ 장난감을 만들려는 경향을 보였다.
전문가들도 특정 색깔과 내용물로 성별을 구분하는 것은 행동이나 직업 등 성 고정관념을 고착화할 수 있어 지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 시절에 양성 정체성이 고루 발달하도록 교육을 받으면 사회성 발달 수준이 높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연구결과”라며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성 고정관념을 고착화하는 유아용품이 여전히 많이 유통되고 있어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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