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보면 모순적인 고민 같지만 혁신적 사고와 실행으로 이를 극복한 제품이 있다. 에어컨은 1902년 미국의 엔지니어 윌리스 캐리어가 발명한 이후 100년이 넘었지만 작동원리는 변함이 없었다. 크기는 커지고 디자인은 다양해졌어도 찬 바람을 팬(fan)으로 돌려 퍼지게 하는 에어컨 공식은 그대로였던 셈.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는 당연시 여겨져 온 이 공식을 깨뜨리기 위해 2010년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시원하길 원하면서도 냉방 직풍은 피하고 싶은 소비자의 상반된 욕구를 해결해보자는 게 목표였다. 삼성전자가 3일 서울 중구 태평로빌딩에서 공개한 무풍 에어컨 개발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했다.
이날 서형준 삼성전자 소비자가전부문 생활가전사업부 에어컨 개발 담당(마스터)은 “에어컨 사용 패턴 조사결과 균일 냉방을 원하는 고객이 많았다”며 “차가운 바람을 계속 맞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는 고객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무풍에어컨 개발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가 2014년 조사한 ‘한국 에어컨 U&A(Usage & Attitude) 리포트’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에어컨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능 1위로 쾌속 냉방을 꼽았고 2위를 균일 냉방, 3위를 냉기 유지로 꼽았다.
삼성전자는 와인저장 창고와 조선시대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로 활용된 석빙고에 주목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서도 시원한 내부 공간 온도가 유지되는 원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
5년간의 고민 끝에 에어컨에서 바람이 나오지 않지만 온도를 시원하게 유지해 주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무풍에어컨은 ‘스피드 냉방’을 통해 실내 온도를 낮춘 뒤, 에어컨 전면에 있는 ‘마이크로 홀’이 균일하게 냉기를 뿌려주는 원리를 이용한다. 이를 위해 도입된 기술은 메탈 쿨링 패널 구조다. 삼성전자는 오디오 스피커에 적용되는 메탈 소재를 에어컨 실내기 전면 패널에 도입했다. 메탈은 기존 에어컨에 사용되는 패브릭 소재보다 냉기를 더 오래 머금는다는 장점이 있다. 메탈에 뚫린 지름 1mm의 13만5000개 홀(스탠드형 기준)을 통해 냉기가 초당 0.15m 수준의 느린 속도로 공간 전체에 흐른다. 지름 1mm의 홀 13만5000개를 메탈에 뚫기 위해서는 초정밀 가공 기술이 필요하다. 서 담당은 “홀의 모양부터 패턴, 크기까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테스트해 최상의 효율을 낼 수 있도록 첨단 금형 기술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2016년에 처음 출시된 제품이 무풍 스탠드형 에어컨이다. 지난해에는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해 무풍 벽걸이형, 천장형 에어컨인 무풍 원웨이(1way) 카세트를 출시했다. 올해 1월에는 기존에 3개였던 팬을 1개로 줄인 무풍 스탠드형 에어컨 슬림을 비롯해 무풍 공기청정기, 무풍 천장형 포웨이(4way) 카세트 신제품을 출시했다.
2017년부터 출시되는 무풍에어컨에는 인공지능 기술도 탑재됐다. 소비자가 에어컨을 사용하는 생활 패턴과 온도, 습도 같은 실내외 환경 정보를 종합해 최적화된 에어컨 모드를 자동으로 설정해준다. 삼성전자의 인공지능 플랫폼인 빅스비를 에어컨 리모컨과 본체에 탑재해 음성으로 제어가 가능하다. 에어컨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진단해 고장을 예측하고 불필요한 전력 낭비를 막아 주는 인공지능 진단 서비스도 가능하다.
무풍에어컨이 에어컨 시장에 가져온 변화의 바람은 무섭다. 2018년 1∼6월 에어컨(스탠드형) 누적판매 기준 무풍에어컨 비중이 90%에 이른다. 지난해 무풍에어컨은 삼성전자 국내 에어컨 판매량의 약 60%, 스탠드형 부문에서는 약 70%를 차지했다. 삼성전자는 업계 처음으로 지난해 1월 1일부터 7월 21일까지 약 7개월 동안 국내 시장에서 가정용 에어컨 누적 판매량 100만 대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운 에어컨 시장점유율 1위 업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지난해 1월 무풍에어컨이 출시된 후 에어컨 판매량이 늘어 에어컨 전 제품 판매 증가를 이끌고 있다”며 “무풍 기술을 보급형 에어컨에까지 적용해 소비자들의 선택의 폭을 넓힐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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