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을 사실상 포기하고 속도 조절을 시사한 것은 최저임금 인상 정책이 현장과 동떨어져 있는 한계를 인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업들이 인건비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신규 채용을 지금보다 더 줄이면 임금을 높여 기업 투자와 가계 소비를 이끌어 낸다는 소득주도성장의 틀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정부 내에 감돌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경제상황이 쉽지 않다는 내부적 판단이 내려진 상황에서 뒤늦게 끌려가듯 공약을 수정하기보다는 미리 공약 달성이 어렵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맞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 현장과 괴리된 정책 한계 인정
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여야 4당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최저임금 정책의 1년간 효과를 살펴보고 속도를 조절할지, 그대로 갈지 결론을 내겠다”고 했다. 최저임금 속도조절 가능성을 처음 시사한 셈이다.
최근 수출 내수 고용의 동반 부진으로 정부가 목표로 삼은 3% 성장이 어려워지면서 정부 전반에 최저임금 속도조절 기류가 확산되고 있다. 2020년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년에는 최저임금을 19.8% 인상해야 하는데 경기 악화 우려가 확산되고 있는 현재 경제상황을 감안할 때 이는 불가능한 목표라는 것이다. 특히 청와대는 최저임금 결정을 앞두고 소상공인·자영업자 단체들이 반발에 나서며 최저임금이 ‘을(乙) 대 을’의 싸움 구도로 흐르는 것에 큰 부담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청와대는 공약 파기에 대한 사과의 대상을 최저임금 수혜를 볼 저소득층에 맞추면서 최저임금 인상 기조에 대해선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 병 주고 약 주는 보완책들
이날 각 경제부처는 최저임금 인상 후폭풍을 수습하기 위해 대책 마련에 고심하는 모습이었다.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노동자와 중소기업, 소상공인은 공동운명체”라며 “임금이 오른 만큼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해 달라. 생산성이 늘지 않으면 추가적인 임금 인상은 어렵다”고 호소했다. 최저임금 인상을 위해 노사정이 함께 노력해 달라는 대통령의 주문과 맥이 닿아 있는 발언이다. 홍 장관은 “노동계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물건을 사주는 운동을 전개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소상공인들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김대준 소상공인연합회 노동인력환경위원회 위원장은 “무작정 소상공인의 인내를 요구하기보단 실질적 대책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최저임금 인상 영향을 크게 받는 외식업과 편의점 가맹본부 중 6곳의 불공정 행위 조사에 착수했으며 하반기에는 200개 대형 가맹본부 실태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17일부터는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하도급업체가 대기업 등 원사업자에게 하도급 대금 증액을 요청할 수 있는 내용의 개정 하도급법이 시행된다. 기획재정부는 일자리안정자금 연장 시행, 소상공인 및 영세 중소기업 카드 수수료 인하, 근로장려세제 확대 등 재정을 투입한 민심 달래기 정책을 추진 중이다.
다만 정부가 소상공인연합회 등이 요구한 카드 수수료와 가맹점 수수료 인하 방침을 강조하면서 최저임금 인상의 부담을 금융사에 넘기려는 것 아니냐는 반발이 나올 수도 있다. 특히 금융사 노조들이 카드 수수료 인하에 반대하고 있는 만큼 최저임금 인상이 ‘노노(勞勞)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 최저임금 인상보다 사회안전망 구축이 우선
전문가들은 최저임금 속도조절이 공식화한 만큼 내년부터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논란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사전에 인상 폭에 대한 사회적 합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부가 임금 인상에 대한 시그널을 미리 시장에 줬다면 병 주고 약 주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며 “최저임금을 올리는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또 다른 행정 절차가 동원되는 건 여러모로 낭비”라고 말했다.
정부가 ‘소득주도 성장’에 지나치게 매몰되다 보니 다른 복지 정책 대신 최저임금 인상에만 매달린다는 비판도 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경제구조를 개혁해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대신에 최저임금에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사회안전망 구축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로 노인이나 취약계층에 저임금 일자리를 제공하면 이들이 나중에 노동시장에서 나가야 할 때 더 큰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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