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선 이상의 것은 신문에서 헤드라인 본 것 이상은 잘 모른다.” 국민 노후자금 630조 원을 운용하는 최고 결정기구인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위원들의 전문성이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투자·금융 전문가가 한 명도 없는 데다 자산운용의 기본 개념도 이해하지 못하는 위원이 상당수인 것으로 확인됐다.
게다가 위원 20명 가운데 13명이 정부 측 위원이거나 친정부, 좌파로 분류되는 등 정치적 편향성도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이 독립성,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스튜어드십 코드’ 같은 칼부터 쥐여주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동아일보가 1999년부터 올해 5월까지 100차례의 기금운용위 회의록(요약본 포함)을 전수 조사한 결과 회의 내용은 ‘최고 의사결정기구’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부실했다. 기금운용위는 국민연금의 중기 자산배분, 연도별 운용계획, 기금 운용지침 등을 심의, 의결한다. 26일에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최종 의결할 예정이다.
동아일보 분석 결과 위원 20명 가운데 금융 전문가는 한 명도 없었다. 기금운용위는 △보건복지부 장관(위원장),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관계부처 차관 등 정부 측 6명 △사용자·근로자·농어민·자영업·시민단체 등 가입자 대표 12명 △관계 전문가(한국개발연구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명으로 구성된다. 전문성보다는 대표성에 초점을 맞춘 구성이다. 전문가 위원인 최정표 한국개발연구원장, 조흥식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도 각각 재벌개혁과 사회복지 전문가로, 금융 전문가로 보긴 어렵다.
이렇다 보니 회의 중에 안건 설명을 이해하지 못해 되묻는 모습이 자주 연출됐다. ‘패시브(시장수익률 추종)-액티브(초과수익률 추구) 운용’ 등 자산운용의 기본 개념까지 반복적으로 설명해야 했다. 위원들은 “돈 굴리는 문제는 저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테크니컬한 것은 판단할 수 없으니 실무진에서 단수 안으로 올리라”고 하는 등 심의·의결 기능을 포기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정권에 따라 좌우되는 정치적 편향성도 문제로 꼽힌다. 전문가 2명은 정부출연 연구기관 몫이라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다. 특히 현 위원인 최 원장과 조 원장은 문재인 캠프의 싱크탱크 ‘정책공간 국민성장’에서 활동했다.
시민단체 몫은 정부 성향에 따라 바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진보 성향의 참여연대,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는 보수 성향의 한반도선진화재단, 바른사회시민회의가 추천하다가 현 정부 들어 다시 참여연대의 추천으로 바뀌었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가 추천한 문미란 위원(소비자시민모임 부회장)은 6·13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 몸담았다.
여기에 근로자 대표(한국노총, 민노총, 공공연맹)까지 더하면 20명 중 13명이 정부 인사이거나 친정부·진보 계열로 분류된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표결로 정부 안을 관철시켜 국민연금을 ‘재벌 길들이기’ 등 입맛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구조다. 대표적으로 정부는 2008년에 일부 위원의 거센 반대 속에 국민연금을 담보로 신용불량자에게 대출을 해주는 안건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처럼 국민연금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조직 개편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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