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남북정상회담 및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경협 재개에 대한 재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경협 재개의 전제조건인 북한 비핵화를 위한 북-미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아직은 “남북경협 사업은 아직 너무 많은 위험(risk) 에 둘러싸여 있다”는 비관론이 큰 상황이다. 20일 본보 미래전략연구소가 개최한 경협 워크숍이 ‘북한 비즈니스 밑그림그리기’라는 잠정적인 제목을 단 것은 그런 이유다.
남북경협이 당장은 현실화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과거 20년의 사례를 통해 남북경협에 수반되는 위험은 무엇이며 어떻게 분류할 수 있는지, 그것은 통상적인 경제활동에 수반되는 위험처럼 관리(manage)할 수 있는가를 미리 고민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하는 20일 워크숍에서 ‘대북 비즈니스의 기회와 리스크’라는 제목으로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의 경협 성패 사례를 2018년 현재에 대입해 본 내용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에는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건강을 잃을 위험, 배우자를 일찍 잃을 위험, 고령화에 따라 ‘돈 없이 오래 살 위험’ 등이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익을 추구하는 투자에도 다양한 위험이 따른다. 신용을 잃을 위험, 유동성 부족에 빠질 위험, 사기를 당할 위험 등이다. 각종 투자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수익이라고 한다면 뜻대로 수익을 내지 못할 각종 불확실성을 일반적으로 위험이라고 말한다. 주식값이 내릴 위험은 작은 것이고 회사가 망할 위험은 큰 것이다.
투자의 귀재 존 보글을 구지 인용하지 않더라도 예상 수익이 높을수록 위험이 크다(High Risk, High Return)는 것은 상식이다. 투자 기간이 길수록 위험도 커진다. 장기 채권의 이자율이 높은 이유다. 그런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거나 합리적인 수준으로 줄이는 것을 위험관리(Risk Management)라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위험을 수량화 할 수 있어야 한다. 위험을 계산할 수 없으면 헤지를 할 수 없고 따라서 수익도 계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경협의 위험은 어떤 종류가 있고, 그것은 관리 가능한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6월 중소기업진흥공단이 경협기업가들을 설문조사한 결과 남북경협에 따르는 위험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정치적 위험(63.4%)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나빠지거나 북한 국내정치가 불안해질 가능성을 말한다. 경영권과 기업 자율성 확보에 대한 불안 등 경제적 위험(7.9%)이 뒤를 이었다. 투자보장, 상사분쟁 해결 등 제도와 실행력에 대한 법적 제도적 위험(4.6%)이 가장 적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5년 5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유사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물류수송 통신 전력 등 인프라 미비(31.2%), 북측 상대 기업의 태도, 자금 판로 사정 등 기업 내부적인 문제(29.8%), 북한 핵 문제 등 정치 외교적인 위험(17.0%), 우리 정부의 남북경협에 대한 지원 등 행정적인 문제(10.6%), 4대 경협합의서에 따른 후속조치 등 경협 제도적인 문제(7.1%)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경협 초기였던 2003년에 비해 정치적 위험에 대한 우려는 작아졌지만 현장에서 실제 겪은 문제에 대한 불만이 커진 것으로 풀이된다.
필자는 2005년 당시 경협 기업인들을 직접 만나 현장에서 느끼는 구체적인 위험이 무엇인지 인터뷰를 했다. 크게 네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인프라’ 위험으로 낙후된 전력 및 도로시설 등에서 오는 손실 가능성을 말한다. 예를 들면 용기와 수송로가 없어서 양파가 풍년이라도 썩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변심’ 위험은 북측의 상대방이 갑자기 말을 바꿀 위험이다. 상부 보고만을 위한 ‘한탕주의’ 식 협상과 계약 후 표변 등으로 인한 손해를 말한다. 세 번째 ‘무지’ 위험은 상대가 경제 및 경영을 모르기 때문에 부딪히는 낭패다.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 과도한 임금을 요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마지막 ‘단절’ 위험은 갑작스런 교통과 통신 중단 사태를 말한다. 경협 기업들은 남북관계 단절이나 북한 내 급변사태로 인적 왕래가 끊어지고 연락이 두절되는 사태에 늘 신경을 곤두세운다고 했다.
하지만 인터뷰 대상 기업들이 모두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사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화인통상을 운영했던 김찬구 회장의 경우 위험의 정도가 커서 사업을 포기한 경우다. 당시 경협사업 경력 16년이었던 김 회장은 미국 교포로서 1989년 처음으로 방북해 2004년까지 59차례 방북하며 다양한 경협 사업을 추진했다. 선박수리소와 골뱅이와 가리비양식장, 농구화공장, 봉제완구 공장, 농산물 가공공장, 러시아 어장 진출 사업 등 다양한 업종에 손을 댔다. 주력 기업은 ‘평양 순평 완구공장’으로 1995년 평양 용성구역에 공장 설립해 4년 동안 운영하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북측과의 불화로 운영을 중단했다.
2005년 5월 인터뷰했던 그는 ‘무지’ 및 ‘변심’의 위험을 관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북측 상대방은 상부 보고만을 위한 ‘한탕주의’ 식 협상과 계약을 한 뒤 무리한 선(先) 투자 요구를 하며 끝내 표변했다는 것이다.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 과도한 임금을 요구하고 및 협상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교체당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반면 (주)엘칸토의 만경대구두공장은 2005년 당시 다양한 위험을 잘 관리하며 성업을 하고 있었다. 1994년 김용운 회장이 진출을 시도해 1997년 김찬구 회장의 주선으로 광명성총회사와 설비투자 및 임가공 사업 계약을 맺었다. 2005년 11월 인터뷰 당시 회사는 법정관리 상태였으나 대북사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선 ‘인프라’ 위험을 잘 관리한 것이 주효했다. 제화업은 특성상 반수동, 반자동 설비를 사용해 전기의 양과 질의 영향을 덜 받았다. ‘단절’ 위험도 미리미리 관리했다. 원자재 운반 등에 평양-남포 간 고속도로를 이용해 교통 두절 위험 줄였다. 평양 현지를 오가느라 기획과 생산, 유통까지 시간(리드 타임)이 많이 걸리는 점을 감안해 유행을 타지 않는 남성화만 생산했다. 전체 구두 생산량의 10%만 북한에서 생산했다.
여기에 지식격차(knowledge gap)를 이용한 지속적인 교육과 기술이전도 북측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술만이 중국을 이기고 살아남을 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일방적으로 공정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통해 근로자의 이해 놓였다고 한다. 8년 동안 일관된 모습을 통해 상호 신뢰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프렉코의 휴대전화부품 사업도 2005년 당시로서는 성공사례였다. 2000년 북한사업진출단을 구성한 이 회사는 삼천리총회사와 정밀금형 임가공 사업 계약 체결했다. 하지만 국내 경기 침체 및 업종전환에 따라 금형사업을 일시 중단하고 2004년 삼천리총회사와 새 사업인 휴대전화 부품(힌지) 제작사업을 시작했다. 2005년 당시 평양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중국과 국내외 대기업에 공급하고 있었다.
책임자였던 조봉현 당시 부사장(현 기업은행경제연구소 부소장)은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고기의 마음을 읽어야한다는 점에 착안해 최고지도자인 김정일 위원장이 좋아할만한 사업을 찾는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2001년 중국 방문 이후 이동통신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피력한 점에 주목해 최근 첨단 기술이전 욕구를 자극한 것이 주효했다. 비전에서 액션플랜까지 기업 활동의 전 과정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주고 컨설팅을 해줬다.
이처럼 2005년 현재 남북경협의 현장에는 관리와 통제가 가능한 위험과 그렇지 않은 위험이 혼재되어 있다.
하지만 2006년 10월 북한이 첫 핵실험을 하면서 정치 경제정책을 보수화하고 2008년 남한에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 퍼주기 논란이 컸던 상황에서 2008년 7월 11일 금강산에서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금강산 관광사업이 중단됐다. 2010년 3월 26일 북한의 천안함 폭침 사건에 따른 정부의 5.24 조치에 따라 내륙 경협이 전면 중단됐다. 2016년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과 2월 7일 장거리로켓 발사 실험에 따라 마지막 남은 경협 사업인 개성공단마저 폐쇄됐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2018년 1월부터 김정은이 전방위적인 대외 평화공세에 나서면서 남북경협 재개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지만 아직 불확실성이 너무 큰 상황이다. 우선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교착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이는 북미 비핵화 대화의 향배가 가장 큰 변수다. 과연 김정은의 ‘완전한 비핵화’ 약속은 진정성이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경우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김정은을 설득하거나 강압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를 관철할 능력이 있는가?
비핵화가 진전되지 않는 경우 북한을 겹겹이 둘러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풀리지 않을 것이며 개별 기업들이 이를 뚫고 경협의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유엔 안보리 제재와 미국 등의 단독 제재에 남한의 단독제재 내용을 파악하는 것만도 국제법률가를 동원해야 할 정도의 난해한 작업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혹여 북한 비핵화가 진전되고 제재가 풀려 사업기회가 오더라도 과연 과거처럼 남한이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다시 차지할 수 있을까? 중국 러시아 등과의 전략적 경쟁관계에서 ‘남한은 인프라나 깔고 돈은 그들이 벌 위험’이 새로 추가될 수도 있다.
북한의 전략적 목표일 수도 있는 ‘핵을 가진 평화(nuclear peace)’가 현실화되어 핵 보유도 비핵화도 아닌 ‘어정쩡한 북한 비핵화’ 상황에서 경협이 일부 재개된다면? 최근 제3국 등에서 북측 인사들을 접촉한 남측 기업인과 인도적 지원단체 인사들은 “공부 좀 다시 해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우린 이제 핵보유국이 되었으니 10년 전과 다른 더 돈 되는 계획을 가져오라’고 배짱을 부리는 것이라면? 앞에서 열거한 것들을 질적으로 능가하는 새롭고 강력한 위험이 남북경협에 암운을 드리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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