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학기 신입회원을 모집한 서울대 프로그래밍 동아리 ‘피로그래밍’ 운영진은 지원자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부분 공대생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지원자 36명 중 23명(64%)이 인문계열이었다. 코딩 테스트를 거쳐 최종 선발된 16명 중 문과생은 11명. 지난해 최종 선발자 19명 중 6명이 문과생이었던 데 비하면 비중이 크게 늘었다. 코딩동아리 ‘멋쟁이 사자처럼’의 서울대, 고려대 지부 회원도 문과생이 각각 90% 이상이다.
인문사회계열 대학생들이 정보기술(IT) 공부 삼매경에 빠졌다. ‘문송하다’(문과라서 죄송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극심한 취업난에 원래 전공과 IT를 아우르는 ‘양수겸장(兩手兼將) 스펙’을 쌓기 위해서다.
IT 전공수업과 코딩학원도 문과생들로 문전성시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복수전공자 중 인문사회계열 비중은 50∼60%에 달한다. 숙명여대 홍보광고학과에 재학 중인 권주희 씨는 “같은 과 동기 10명과 ‘프로그래밍 입문’(IT공학과 전공필수과목) 수업을 들었는데 인문사회계열이 3분의 2가 넘어 교수님조차 놀랐다”고 말했다. 코딩학원에 다니는 장민섭 씨(상명대 컴퓨터과학과 4학년)는 “요즘 학원에는 전공자보다 문과생이 더 많다”고 전했다.
IT로 전향하는 문과생이 느는 것은 일자리 때문이다. 지난해 말 교육부가 발표한 ‘고등교육기관 졸업자 취업통계조사’에 따르면 인문계열, 사회계열 전공생의 취업률은 각각 57.6%, 64.7%로 전체 취업률(67.7%)을 밑돌았다. 반면 공학계열은 71.6%였다.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IT 경험을 쌓은 인문사회계열 전공자를 다시 보기 시작한 점도 ‘문송’들에게는 기회가 되고 있다. 한 대기업 계열 IT서비스업체 임원은 “프로그래밍 전문가는 많지만 사업 통찰력과 IT 지식을 겸비한 실전용 인재는 부족하다”면서 “문과생들은 이과생 못지않은 장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보다 인력이 적은 스타트업도 의사소통에 강점이 있는 문과 출신 융합형 인재에 주목하고 있다. 강사평가 플랫폼 ‘별별선생’의 박세준 대표는 “IT 스타트업에서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새로운 서비스가 어떻게 구현될지 이해하고 영업팀과 기술팀을 조율하는 능력이 필수인데 1등은 문과 출신 IT 소양자, 2등은 인문학 지식을 갖춘 기술자”라고 평가했다.
IT로 전향해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는 문과생도 적지 않다. 국문학과를 졸업한 3년 차 웹개발자 하조은 씨는 “문과 출신 개발자들은 이용자 친화적으로 사고하는 데 강점이 있어 UI(사용자환경)와 UX(사용자경험) 개선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미국 일본 등에서는 문과 인재들이 주로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과 파트너십 대상을 물색해 기업을 키워내는 역할을 맡는다. 일본 와세다대 경제학부를 나와 현지 드론업체에 취직한 신충국 씨는 “일본 명문대 문과생들 사이에서는 스타트업에 들어가 기술 제휴와 해외시장 개척 등 커리어를 쌓는 게 트렌드”라고 말했다.
송인성 서울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이공계와 인문사회계로 칸막이가 쳐진 기존 산업현장에서는 통합적 지식이 주목받지 못했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IT 통찰력을 갖춘 ‘양손잡이형’ 인재가 각광받는다. 문과생들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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