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페르디난트 피에히 독일 폴크스바겐그룹 이사회 의장의 솔직한 고백이 국내외 자동차업계에서 화제가 됐다. 그는 독일 일요판 신문 ‘빌트 암 존타크(Bild am Sonntag)’와의 인터뷰에서 “그룹 디자인 총괄책임이었던 피터 슈라이어를 기아자동차로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며 아쉬워했다. 슈라이어가 2006년 기아차로 옮긴 뒤 올린 디자인 경영의 성과를 보고 피에히 의장이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한 것이다. 슈라이어는 기아차 부사장을 거쳐 현재 현대·기아차 디자인 총괄 담당 사장을 맡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에는 글로벌 자동차업계에서 이른바 ‘스타’로 평가받는 외국인 임원이 적지 않다. 이들은 디자인이나 고성능 차량 연구개발(R&D), 마케팅 등 특정 분야 전문가로 관련 업계에서는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춘 ‘프로페셔널’로 통한다. 대부분 폴크스바겐이나 BMW 등 해외 유명 자동차업체에서 근무하다가 ‘삼고초려(三顧草廬)’도 불사하는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고 현대차그룹에 합류했다. 재계에서는 1999년 글로벌 판매 순위 10위였던 현대차그룹이 현재 세계 5위권 메이커로 성장하는 데 전문성으로 무장한 외국인 임원들의 ‘원 포인트 레슨’이 큰 역할을 차지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 ‘디자인’과 ‘성능’을 책임지는 쌍두마차
현대차그룹에는 외국인 사장이 2명 있다. 현대차와 기아차 디자인을 총괄하는 슈라이어 사장과 차량 성능 시험과 고성능 차량 개발을 총괄하는 알버트 비어만 사장. 이들은 모두 독일 출신으로 정 부회장이 각별히 공을 들여 영입했다.
슈라이어 사장은 2006년 기아차 디자인 총괄 부사장으로 스카우트될 당시 크리스 뱅글(BMW), 발터 드 실바(아우디)와 함께 ‘유럽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혔다. 그는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아우디 디자인 총괄 책임자로 근무하며 ‘TT’ ‘A6’ 등 혁신적이고 스포티한 디자인을 바탕으로 아우디 디자인의 변혁을 주도했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는 폴크스바겐 디자인 총괄 책임자로 일했다.
기아차에 와서는 디자인 방향성을 ‘직선의 간결함’으로 정했다. 또 호랑이 코 모양의 라디에이터 그릴로 상징되는 ‘패밀리 룩’(한 회사에서 나온 자동차 모델들의 특징을 비슷하게 가져가면서 다른 회사 모델들과 차별화하는 디자인)을 구축했다. 그 결과 2006년과 2007년 연속 적자를 냈던 기아차는 2008년 흑자(3000억 원)로 돌아섰다. 특히 2010년 선보인 ‘K5’는 국내 중형차 시장을 석권하던 현대차 ‘쏘나타’를 위협할 정도로 크게 히트했다. 당시 K5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시장에도 기아차 디자인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덕분에 2013년 사장으로 승진했다.
슈라이어 사장은 부하 직원들의 의견을 잘 수용해 ‘소통 전문가’란 평가도 받는다. 실제 모터쇼 등 공식 행사 자리에 가면 슈라이어 사장이 직원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장면을 곧잘 목격할 수 있다. 그의 당면 과제는 최근 현대차가 새롭게 선보인 디자인 정체성인 ‘센슈어스 스포티니스(Sensuous Sportiness)’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센슈어스 스포티니스는 디자인의 과거와 현재가 미래로 연결될 감성적 혁신을 지향하는 개념. 비례와 구조, 스타일링, 기술 등 4가지의 기본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것을 추구한다.
비어만 사장은 고성능 차량 분야에서 세계 최고 전문가로 통한다. BMW에서 고성능 버전 모델인 ‘M’ 시리즈를 비롯해 각종 모터스포츠 대회 참가 차량을 개발했다. 2015년 현대·기아차 부사장으로 영입돼 남양연구소에서 시판 전 차량 성능 시험과 고성능 차량 개발을 총괄하고 있다. 올해 1월에는 짧은 기간 내 현대차, 기아차, 제네시스 브랜드 차량의 주행 성능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공로를 인정받아 사장으로 승진했다. 월드랠리챔피언십(WRC) 등 주요 국제 모터스포츠 대회에서 비어만 사장이 개발한 현대차 모델이 연이어 우승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해 9월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를 통해 현대차 고성능 브랜드 ‘N’의 첫 번째 모델인 ‘i30 N’도 성공적으로 선보였다. 이 모델은 지난해 하반기(7∼12월)부터 유럽시장에서 팔리고 있다.
비어만 사장은 친화적 리더십을 가진 경영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처음 현대차로 왔을 때 가진 회식 자리에서 본인 이름에서 따온 ‘맥주(비어)만’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부하 직원들과 어울렸다. 이후에도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술자리를 마련하거나 부하 직원의 결혼식 주례를 맡는 등 외국인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 사내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차세대 주자 ‘3인방’
현대디자인센터를 이끌고 있는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도 슈라이어 사장 못지않게 유명한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다. 2015년 6월 폴크스바겐그룹 인사에서 디자인 디렉터였던 그의 이름이 사라지자 자동차 관련 외신들이 그가 어디로 옮길지에 촉각을 곤두세울 정도였다. 결국 그가 간 곳이 현대차로 확인되면서 직접 영입을 추진한 정 부회장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기도 했다.
벨기에 출신인 동커볼케 부사장은 기계공학을 전공해 자동차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디자이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 푸조에서 자동차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기 시작해 1992년 폴크스바겐그룹 계열인 아우디로 이직했다. 1998년 콘셉트카 ‘AL2’로 ‘올해의 유럽 디자이너상’을 받았다. 슈퍼카 브랜드인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무르시엘라고’ 등도 디자인했다. 현대차에서는 ‘그랜저’ ‘코나’ ‘싼타페’ 새 모델을 디자인했다.
현재 내년에 나올 제네시스의 첫 번째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모델인 ‘GV80’의 디자인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그는 아마추어 레이서로도 활동하는 등 항상 새로운 도전을 즐긴다. 그 자신도 이런 도전적 성향이 현대차 유전자(DNA)와 일치한다고 밝히고 있다.
제네시스사업부를 이끌고 있는 맨프레드 피츠제럴드 부사장은 마케팅 전문가다. 2016년 현대차에 영입됐다.
미국 출신인 그는 GM 계열인 오펠의 글로벌 홍보 담당을 거쳐 람보르기니 글로벌 마케팅 담당 임원을 지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람보르기니 브랜드 총괄 책임자로 일하면서 람보르기니가 고성능 수제차 브랜드에서 글로벌 고급차 브랜드로 변신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일 프리미엄 가전업체인 ‘뢰베(LOEWE)’에서 마케팅 총괄 책임자, 스페인 마케팅 컨설팅 회사인 ‘더 브랜드 앤드 디자인 컴퍼니(The Brand and Design Company)’에서 파트너를 각각 지냈다.
독일 출신인 토마스 쉬미에라 현대차 고성능사업부장(부사장)은 기계공학도 출신 영업마케팅 전문가. 1987년 BMW에 차체 설계 엔지니어로 입사해 구매, 품질, 상품 기획 등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1997년 이후 영업 마케팅 분야에서 주로 일했다. 독일시장 영업마케팅 매니저, ‘M’ 브랜드 영업마케팅 담당 임원, 본사 영업마케팅 총괄 임원, ‘M’ 브랜드 북남미사업 총괄 임원을 지내다가 올해 3월 현대차에 합류했다.
현대차의 고성능차량 사업 방향성을 전체적으로 기획하고 조율해 글로벌 고성능차량 시장에서 현대차의 입지를 넓혀 가는 게 쉬미에라 부사장의 과제다. 현대·기아차에서 고성능차량 연구개발 부문을 담당하고 있는 비어만 사장과는 BMW에서도 호흡을 맞춰본 경험이 있다.
▼권역별 독자전략 수립… 현지상황에 발빠른 대처▼
지역사령관으로 주목받는 임원 5인
최근 들어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에서 주목받는 임원이 5명 있다. 올해 6월 조직 개편을 통해 신설된 ‘권역본부’를 맡고 있는 부사장들이다. 현대차에는 이용우 북미권역본부장, 최동우 유럽권역본부장, 구영기 인도권역본부장 등 3명이 있다. 기아차 소속은 임병권 북미권역본부장, 박용규 유럽권역본부장 등 2명이다.
이들은 현대차와 기아차의 주요 시장인 북미, 유럽, 인도 지역 전문가로 권역별 자율경영 체제를 통해 수익성을 높여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를 위해 권역본부장들은 독자적으로 시장을 분석하고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 상품 생산 및 판매도 주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국가별 실적을 종합하고 손익 관리를 하는 기획·재경 조직과 시장의 수요를 선제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반영한 전략을 수립하는 상품 및 고객경험 조직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주요 권역별로 상품전략, 생산, 판매 등을 통합 운영해 현지 시장과 고객의 요구에 능동적이면서도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다.
미국 생산·판매법인과 캐나다, 멕시코 판매법인을 관할하는 이 본부장은 현대차 아중동사업부장, 브라질 법인장을 지낸 해외 영업 전문가. 브라질 전용 신차로 개발한 ‘HB20’을 성공적으로 현지 시장에 안착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북미시장 개척에 나설 예정이다. 현대차그룹 계열 광고회사인 이노션에서 미주지역본부장도 지내 광고홍보 분야에도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동우 현대차 유럽권역본부장은 체코와 터키 생산법인과 현지 판매법인을 이끌고 있다. 현대차 체코법인장과 유럽관리사업부장을 지내 유럽시장 실정에 밝다. 기계공학도 출신으로 구동부품개발실장도 지내 생산 및 공정 관리 측면에서도 효율성을 높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구영기 현대차 인도권역본부장은 인도 생산 및 판매법인을 관할하고 있다. 인도 법인장으로 있다가 권역본부장이 된 만큼 당장 큰 업무 변화는 없다. 그는 인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기존에 3년 단위로 전략을 수립하던 것이 권역본부 도입으로 최대 10년 동안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았다”며 “판매와 서비스 부문뿐만 아니라 생산과 수출 부문에서도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현대차 인도권역본부는 2020년까지 신차 8종을 내놓고 현지 시장 공략을 확대할 계획이다.
임병권 기아차 북미권역본부장은 현대차 사업관리본부장과 해외영업본부장을 지낸 영업마케팅 전문가. 기아차 미국과 멕시코 생산, 판매법인을 이끌고 있다. 전기공학도 출신이어서 생산 관리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기아차 슬로바키아 생산법인과 현지 판매법인들을 관할하고 있는 박용규 유럽권역본부장도 이공계(기계공학도) 출신 판매 전문가. 기아차 수출관리실장, 중남미지역본부장, 러시아판매법인장을 지냈다. 유럽법인장을 지내 현지 시장 상황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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