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서 파는 약, 한국 달랑 13가지… 日은 2000개-美는 3만개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5일 03시 00분


[규제 공화국엔 미래가 없다]<3>편의점 상비약 규제 6년째 제자리

《 누구나 한 번쯤은 약국이 문을 닫은 심야 시간이나 휴일에 갑자기 비상약이 필요해 안절부절못한 경험이 있다. 2012년 말부터 24시간 편의점에서 손쉽게 상비약을 구할 수 있어 이런 불편은 줄었다. 하지만 국내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의약품은 고작 13개. 판매 품목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6년째 달라지지 않고 있다. 》
 
2일 오후 경기 파주시 탄현면의 한 편의점에서 손님이 안전상비의약품을 구입하고 있다. 이 지역은 주변에 약국이 없어 편의점에서만 상비약을 구할 수 있다. 파주=원대연 기자 yeom72@donga.com
2일 오후 경기 파주시 탄현면의 한 편의점에서 손님이 안전상비의약품을 구입하고 있다. 이 지역은 주변에 약국이 없어 편의점에서만 상비약을 구할 수 있다. 파주=원대연 기자 yeom72@donga.com
2일 오후 1시경 경기 파주시 탄현면의 한 편의점. 인근 회사에 다니는 임모 씨(46)가 감기약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임 씨는 “오전에 갑자기 몸살 기운이 느껴져 점심시간을 이용해 약을 사러 왔다”고 말했다. 그는 “동네에 약국이 없어 급하게 비상약이 필요할 때 편의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지역마다 약국이 잘 갖춰진 편이지만 약국이 없거나 약국이 문을 닫는 심야나 휴일에는 비상약을 구하기 힘든 곳이 적지 않다. 설령 편의점이 가까이 있다 해도 그곳에서 구입할 수 있는 약은 13개 품목에 불과하다. 늦은 밤 가벼운 상처가 나 치료를 하려 해도 무조건 병원을 찾아야 한다. 이 때문에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의약품 품목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정부는 약사회의 눈치만 살핀다는 지적이 나온다.

○ 병원 근처에만 다닥다닥 몰린 약국

탄현면 축현리는 면소재지로 초·중학교와 농협, 마트 등이 몰려 있다. 파주국가산업단지로 이어지는 지방도로 359호선이 동네 한가운데를 지나 유동인구가 많지만 정작 약국은 없다. 10여 년 전 약국 하나가 생겼지만 2년 만에 폐업했다. 80세가 넘는 어르신이 운영하던 동네 약국도 지난해 문을 닫았다. 면사무소를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약국은 4.2km 떨어져 있다. 승용차로 약 8분 거리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한 시간에 한 번 지나는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이 지역 주민들에겐 동네 중심에 있는 24시간 편의점이 사실상 약국이다. 지금과 같은 환절기에는 감기약을, 농번기에는 파스를 이곳에서 구입한다. 심영식 축현2리 이장은 “편의점이 없을 때는 멀리 장보러 나갈 때마다 비상약을 한 움큼씩 사왔다”며 “급하게 소화제나 진통제가 필요할 때 편의점이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탄현면에 위치한 산업단지 내에도 약국이 없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탄현일반산업단지의 경우 약국이 3.5km가량 떨어져 있어 산업단지 입구에 있는 편의점이 유일하게 비상약을 구할 수 있는 곳이다.

○ 편의점 판매 의약품 확대 요구 높아

정부는 2012년 말 일반의약품을 편의점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편의점 안전상비의약품 공급액은 2013년 153억 원에서 2015년 235억 원, 지난해 329억 원으로 4년 만에 2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늦은 밤뿐 아니라 직장인들의 출퇴근시간에 문을 열지 않는 약국이 많아 편의점에서 약을 구입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현재 편의점에서 팔 수 있는 상비약은 △해열진통제 △감기약 △소화제 △파스 등 4개 부문 13개 품목이 전부다. 미국은 슈퍼마켓이나 마트에서 판매하는 약이 약 3만 개, 일본은 2000개 수준에 이른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미국과 일본은 약국 외 판매를 허용할 때 특정 성분을 기준으로 하지만 우리나라는 제품별로 따지기 때문에 허용범위에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국민 편리를 위해서는 편의점에서 파는 약 종류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올해 8월 174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6.8%가 ‘안전상비의약품 품목을 지금보다 늘려야 한다’고 답했다. 편의점에서 판매했으면 하는 품목은 제산제(위산 과다증이나 위궤양 치료제), 지사제(설사약), 포비돈액(소독약), 화상연고 순이었다.

○ 약사회 반발에 손놓은 정부

보건복지부는 2012년 편의점 상비약 제도를 시행하며 “소비자들의 약 사용 실태를 점검해 시행 1년 뒤 품목을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1년 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실태 연구 보고서를 내놓은 것 외에 3년 넘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016년 7월 정부 합동 ‘서비스경제발전전략’ 회의에서 안전상비약 규제가 과도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그제야 품목 조정을 시작했다.

정부는 2017년 3월 △대한의학회(2명) △대한약학회(2명) △시민사회단체(2명) △보건사회연구원(1명) △언론(1명) △대한약사회(1명) △편의점산업협회(1명) 등 총 10명이 참여하는 ‘안전상비의약품 지정심의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상비약 품목 조정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줄이고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현재까지 6차례 회의를 진행했지만 단 한 개의 품목도 추가하지 못한 채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말 5차 회의에서 제산제와 지사제를 추가하는 방향으로 합의가 이뤄질 예정이었으나 당시 약사회 측 위원의 자해소동으로 합의가 무산됐다. 올해 8월 8일 열린 6차 회의에서는 일부 품목에 대한 표결이 이뤄졌지만 상비약의 안전성 기준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약사회의 주장에 품목 추가를 확정하지 못했다.

약사회는 이미 편의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타이레놀을 두고 “위험성이 크다”는 이유로 제외할 것을 요구하는 등 위원회 차원에서 합의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신현호 변호사(시민사회단체 몫)는 “상비약 품목 확대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고시를 통해 추진하면 되는 사안”이라며 “더 이상 위원회에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지금이라도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상비약 품목 조정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위원회 뒤로 숨지 말라는 얘기다. 하지만 복지부 관계자는 “올해 안에 위원회가 원만히 합의를 해주리라 기대한다”고 밝혔다.

파주=김철중 기자 tn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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