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금융이 강한 경제 만든다]1부 손발 묶인 ‘걸리버 금융’
<1>도약하는 세계, 퇴보하는 한국
“도쿄(東京)를 다시 국제금융도시로 세계 속에 빛나게 하겠다.”
지난달 일본 도쿄도는 ‘국제금융도시 구상’의 일환으로 나카소 히로시(中曾宏) 전 일본은행 부총재를 도쿄의 ‘금융시장’으로 내정했다. 영국 금융특구 ‘시티오브런던’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도쿄도는 2020년까지 외국 금융사 40개를 유치한다는 목표로 해외 고급 인력의 체류 자격 완화, 금융특구 지정, 법인세 인하에 나섰다. 한때 미국,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금융 강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금융 입국’ 전략에 시동을 건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눈총 받으며 한동안 움츠렸던 금융산업이 다시 부활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세계 각국이 규제 완화, 금융허브 조성, 금융 신산업 지원 등을 통해 금융업을 키우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금융이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의 핵심 산업임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 세계 금융허브의 차세대 격전지 된 아시아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금융허브 경쟁이 치열하다. 영국 컨설팅그룹 지옌이 발표한 ‘세계 10대 금융도시’에 아시아에만 홍콩(3위) 싱가포르(4위) 상하이(5위) 도쿄(6위) 베이징(8위) 등 5곳이 몰려 있다.
중국은 산업 구조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업그레이드하는 핵심 방안으로 금융을 육성하고 있다. 국유은행들을 세계 1∼4위의 초대형 은행으로 키워낸 중국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 기존 금융허브에 이어 선전(深圳)을 새로운 금융 중심지로 키우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낙후된 금융 인프라를 일시에 해소하기 위해 정보기술(IT)과 금융이 결합한 핀테크 산업을 전략적으로 키우고 있다. 중국에선 “거지도 알리페이로 구걸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바일 금융이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다.
금융 자유화, 낮은 세금, 무역항의 입지 등을 앞세운 싱가포르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중국과 동남아 경제 성장의 순풍을 타고 글로벌 허브로 위상을 높였다. 2015년부터는 저성장을 타개할 신성장동력으로 핀테크 산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혁신 기술을 접목시킨 ‘스마트 파이낸셜 센터’를 구축해 아시아 금융허브 수성에 나설 계획이다.
○ 유럽 금융수도 경쟁 치열
유럽에선 런던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잠시 주춤한 사이 주도권을 뺏어 오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가장 적극적인 곳이 프랑스다. 투자은행 로스차일드 출신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선봉에 섰다. 프랑스는 지난해 7월 “파리를 유럽의 금융수도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했다. 금융회사를 유치하기 위해 법인세를 인하하고 금융 고소득자에 대한 누진세를 폐지하는 등 금융 규제를 완화했다. 올 초엔 ‘파리를 선택하라’는 주제로 글로벌 투자 프로젝트도 발표했다. 2021년까지 파리 서부 외곽인 라데팡스 지역에 초고층 건물 7개를 지어 새로운 금융지구를 조성할 계획이다.
독일은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금융허브를 선점하기 위해 노동법까지 고치고 있다. 해고를 어렵게 하는 독일 노동법에서 금융회사를 제외하겠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금융위기 이후 특유의 ‘은행 비밀주의’가 위태로워진 스위스는 가상통화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스위스 정부가 2013년부터 추크시에 조성한 ‘크립토밸리’(가상통화 도시)에는 130개국에서 온 170여 개의 블록체인 기업이 입주했다. 인구(3만 명)보다 일자리(4만 개)가 더 많은 도시가 된 것이다.
○ “금융은 성장과 일자리 창출의 전략산업”
세계 각국이 이처럼 나선 것은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금융산업의 전략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경제의 부활에도 금융산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최근 발표한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미국은 10년 만에 1위에 올랐다. WEF는 “활력 있는 기업 문화, 경쟁적 노동 시장과 더불어 선진적인 금융 시스템이 미국의 혁신 생태계를 세계 최고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금융산업의 일자리 창출 효과도 크다. 특히 IT와 금융이 융합한 기술 혁신에 따라 핀테크, 빅데이터 등 새로운 영역의 일자리도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프랑스 총리실은 금융업에서 직접 창출되는 일자리만 80만 개이고, 금융 일자리 1개마다 회계, 법무, IT 서비스 등 간접 일자리가 3개씩 더 만들어진다고 분석했다.
마이클 마이넬리 지옌그룹 회장은 “15년 전만 해도 런던, 뉴욕만 들여다봤지만 지금은 100여 개 도시를 지켜봐야 할 정도로 금융 중심지 경쟁이 치열하다”며 “세계 각국에서 금융 신산업 육성을 위한 투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관치 길들여진 ‘가두리 한국’, 세계 50대銀에 1곳도 이름 못올려 ▼
“새 정부에서 금융이 소외된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문재인 정부의 인수위원회 역할을 한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이한주 경제1분과위원장은 지난해 5월 이런 해명을 내놨다. 청와대 직제개편으로 경제금융비서관이 경제정책비서관으로 바뀌며 ‘금융’이 사라진 데다 새 정부 경제팀이 진용을 갖추는 동안 금융위원장 인선만 미뤄진 여파였다. 업계는 물론이고 당국에서도 “금융은 뒷전”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올해 5월 또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문 대통령이 가계소득 동향을 점검하기 위해 소집한 경제부처 장관회의에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초대받지 못한 것이다. 진보 색채가 뚜렷한 강성 정치인인 김기식 전 의원을 금융감독원장에 앉힌 것도 논란에 불을 지폈다. 현 정부가 금융을 복지 강화나 적폐 청산을 위한 수단 정도로 본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최 위원장은 지난해 기자간담회에 이어 올 7월 국회 정무위원회 회의에서도 ‘금융 홀대론’에 대해 해명을 해야 했다.
세계 주요국이 ‘금융 허브’ 슬로건을 내걸고 앞다퉈 금융산업을 육성하는 동안 홀대론이 끊이지 않는 한국의 금융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금융업은 경제의 ‘혈맥’이자 고급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핵심 서비스 산업이지만 현 정부에선 금융을 키우겠다는 비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 퇴보하는 한국 금융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달 발표한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 금융의 경쟁력은 140개국 중 19위였다. “한국 금융이 우간다보다 못하다”는 오명은 벗었지만 한국의 전체 국가경쟁력 순위(15위)보다 4계단 낮았다. 글로벌 금융전문지 더뱅커가 올해 발표한 ‘세계 50대 은행’에 국내 금융사는 1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런 성적표는 국내에만 갇혀 답보를 거듭하는 ‘가두리 양식’ 같은 한국 금융의 수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제조업에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글로벌 기업이 나오는 것과 딴판이다.
한국 금융업은 활력을 잃은 지 오래다. 국내총생산(GDP)에서 금융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4.96% 그쳤다. 이 비중은 2004년부터 12년 동안 5%대를 이어오다가 2016년부터 4%대로 쪼그라들었다.
금융업 취업자 수도 2013년(87만5000명) 정점을 찍은 뒤 5년째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전체 취업자에서 금융업 취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처음으로 2%대(2.96%)로 떨어졌다. 인터넷·모바일을 이용한 비대면(非對面) 거래 증가로 인력 수요가 줄어든 영향도 있지만 금융 분야의 새로운 비즈니스를 발굴하지 못한 탓이 크다.
최근 국내 은행들이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리고 있지만 내실은 뒷걸음질쳤다. 은행이 자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용했는지 보여주는 총자산이익률(ROA)과 이익창출 능력을 나타내는 자기자본이익률(ROE)은 올 상반기(1∼6월) 각각 0.7%, 8.9%였다. 금융위기 여파에서 벗어나던 2011년 상반기(각 1.2%, 14.3%)보다 못한 성적이다.
○ 금융 선진화, 정부부터 먼저 변해야
한국 금융을 취약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로 반(反)시장적이고 불합리한 규제가 꼽힌다. 정부가 금융을 독립적인 산업으로 보지 않고 가계와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인식하면서 규제의 틀 안에 가둬둔 탓이다.
동아일보가 국내 금융권 최고경영자(CEO) 6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금융산업 발전을 위한 과제’로 ‘규제 개혁’을 꼽은 응답이 75%(복수 응답)로 가장 많았다.
CEO들은 겉으로 드러난 규제 못지않게 구두 개입, 행정지도처럼 ‘숨어 있는 규제’(응답률 55%)나 ‘가격 개입’(27%) 같은 정부의 통제가 금융 경쟁력을 떨어뜨린다고 입을 모았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영세 자영업자의 부담을 낮추기 위해 정부가 카드 가맹점 수수료 인하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직접 카드 수수료가 아예 없는 간편결제 ‘제로페이’ 도입까지 추진하고 있다. 2년 넘게 자동차 보험료를 동결했던 보험사들도 보험료 인상을 추진하다가 “인하 요인도 있다”는 금융 당국자의 말에 눈치를 보고 있다.
신산업 발굴을 가로막는 ‘빗장 규제’도 문제로 꼽힌다. 금융회사가 신사업을 발굴해도 정부의 소극적 태도나 늑장 대응 때문에 좌절된 사례가 많다. 지난해 11월 초대형 투자은행(IB)으로 지정된 증권사들은 핵심 업무인 발행어음 인가를 두고 공정거래위원회 내부거래 조사, 대주주 적격성 심사 등을 이유로 1년째 심사를 받지 못하고 있다.
현 정부 들어 금융회사에 대한 인사 개입은 더 심해졌고 고질적 병폐인 관피아(관료+마피아), 정피아(정치권+마피아) 등의 낙하산 인사 관행도 바뀌지 않고 있다.
○ 신뢰 없는 금융사에 미래도 없어
금융회사들도 한국 금융을 ‘우물 안 개구리’ 신세로 만든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금융사들이 안정적인 담보대출에 의존해 ‘이자 장사’로 손쉽게 돈을 번다는 비판은 계속되고 있다. 올 들어 4대 시중은행의 이자이익은 16조7600억 원으로 지난해보다 10% 이상 늘며 사상 최대 실적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담보가 부족한 중소·벤처기업의 기술력과 미래 가치를 보고 자금을 조달해주는 ‘생산적 금융’의 역할은 부족하다. 지난해 은행권의 중소기업 대출 가운데 담보대출 비중은 70%를 넘어선다.
동아일보 설문조사에서도 CEO 42%가 금융산업을 저해하는 금융회사의 문제로 ‘이자이익에 치중한 단순한 수익 구조’를 꼽았다. 이어 ‘장기 전략의 부재’(40%), ‘도전·혁신 문화 부족’(35%)을 지적했다. 지배구조가 취약해 로비와 정권 실세의 입김에 쉽게 흔들리는 금융사 CEO들은 장기 비전을 추구하는 대신 단기 실적에 집착하는 행태를 보여 왔다.
특히 올 들어선 은행 채용비리, 유령주식 배당 사고, 대출금리 조작 의혹 사태까지 이어지며 금융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금융업의 신뢰도 하락은 금융 소비자들의 투자 의욕을 떨어뜨리고 실물경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금융을 핵심 서비스 산업으로 키워야 한국 경제의 역동성이 생길 것”이라며 “이를 위해선 불필요한 금융규제부터 과감히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은아 achim@donga.com·김재영 기자
특별취재팀
▽팀장 정임수 경제부 차장 imsoo@donga.com
▽경제부 김재영 조은아, 런던=김성모, 시드니·멜버른=박성민, 싱가포르=이건혁, 호찌민·프놈펜=최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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