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에서 만난 쓰루호 세이시로 씨(76)는 24세 때 일본의 통신회사 NTT도코모에 입사했다. 그는 꼬박 36년을 그곳에서 근무하고 법정 정년 연령인 60세를 채우고 은퇴한 뒤 지금까지 매달 월 25만 엔(약 253만 원)을 연금으로 받는다. 그는 은퇴 이후 NTT에서 상담역으로 2년 동안 더 일했고, 그 다음에는 국책연구기관으로 옮겨 4년여를 근무했다. 그 덕분에 연금 외에 추가 수입이 있어 식비, 의류비, 친구들과의 교제비 등을 지출하는 데 큰 부담이 없는 편. 쓰루호 씨는 “일본에서 매달 25만 엔의 연금으로는 화려한 생활이 불가능하지만 아내와 조촐하게 노후 생활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며 활짝 웃었다.
○ 연금 재정 안정 위해 정년 연장 추진
최근 일본 정부는 기업에 70세까지 ‘계속 고용’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일손 부족 문제 해결이 정책의 표면적인 이유. 하지만 속내는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사회보장비용을 충당할 재원이 부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년 연장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의 법정 정년은 60세. 근로자가 원하면 65세까지는 의무적으로 고용하게 돼 있다. 일본 정부의 계획은 이를 70세까지로 연장하자는 것이다. 계획대로 되면 현재 65세인 공적연금 수급 개시 연령도 70세 이후로 늦출 수 있다.
일본의 공적 연금 구조는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크게 국민연금과 후생연금으로 나뉘어 있다. 공무원연금과 같은 공제연금이 따로 있었지만 3년 전 후생연금에 통합됐다. 일본의 국민연금은 20세 이상 모든 국민이 가입해야 하며 정액의 보험료를 내고 정해진 액수의 연금을 받는다. 한국의 기초연금처럼 저소득층의 노후 생활을 보장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정부의 지원도 받는다. ‘일본 국민연금=한국의 기초연금+국민연금’인 셈이다. 후생연금은 직장인을 위한 연금이다. 직장인은 국민연금과 후생연금 외에 퇴직연금에도 가입한다. 그 결과 자영업자나 개인사업자보다 연금 수령액이 많다.
일본의 공적연금은 2002년부터 적자를 기록했다. 당시 후생노동성은 2100년까지 필요한 연금지급액이 740조 엔(약 7500조 원)으로, 부족액이 480조 엔(약 486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일본 정부가 연금 제도 개혁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마무라 고헤이 게이오대 교수는 “(정년 연장 의무화는) 장수 리스크(고령화)와 피보험자 수 감소(저출산) 문제가 계속되면서 연금 지급에 대한 정부의 고민이 깊어진 상황에서 나온 조치”라고 밝혔다. 근로자들이 오래 일할 수 있다면 그만큼 연금 재정이 고갈되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뜻이다.
70세까지 계속 고용을 유지하는 게 가능할까. 도쿄의 연금생활자들은 “가능한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공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뒤 도쿄보호관찰소에 재취업한 이나바 아키오 씨(67)는 “60세에 정년을 맞아 연금을 받고 있지만 직업소개소를 통해 취업을 했다. 앞으로 15년은 더 일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일반 기업체에서도 이와 관련해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다카스기 노부야 전 후지제록스 회장은 “임원이 되지 않더라도 경험을 살릴 수 있는 다양한 업무가 마련돼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다. 기업에서 일찍 퇴출되기 쉬운 한국과 달리 정년을 맞는 과장, 머리가 희끗희끗한 부장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게 일본 회사”라고 밝혔다. ○ 연금 지급액 자동조절 장치 마련
일본 정부는 2004년 대대적인 연금 개혁을 실시했다. 급여의 13.58%였던 연금 보험료율을 그해부터 해마다 0.354%씩 올려 2017년에 18.3%까지 높인 뒤 고정시켰다. 반면 지급하는 연금액은 현재의 57.7%에서 2023년 50.2%까지 단계적으로 낮출 예정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이 ‘거시경제 슬라이드’의 도입이다. 거시경제 슬라이드는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출산율이 감소하면 그에 맞춰 지급하는 연금액을 자동적으로 삭감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 연금 재정이 악화하면 지급하는 연금액을 줄인다는 뜻이다. 이 시스템은 물가 상승 때만 적용하도록 했기 때문에 디플레이션 상태가 계속돼 온 일본에서는 현재까지 적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래를 대비해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홍무 와세다대 상학부 교수는 “일본은 소비세 등을 통해 연금기금을 축적해 두긴 했지만, 기금 고갈에 대한 위기의식이 상존하고 ‘우리는 돈만 내느냐’는 젊은 세대의 불만도 컸다”면서 “거시경제 슬라이드는 세대 갈등을 풀어보고자 끌어온 장치”라고 설명했다.
현재 일본의 공적연금 기금은 159조 엔(약 1609조 원)으로 세계 최대 규모다. 올해 1분기(1∼3월) 3.18%의 흑자를 기록하는 등 운영 실적이 나쁘지 않지만 여전히 재정 안정성에 대한 불안은 남아 있다. 거시경제 슬라이드 시스템에 따르면 공적연금 기금은 2043년이 되면 1년 치의 적립금만 남겨놓도록 설정돼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미래 빈곤율에 대한 고민이 만만치 않다. 안정된 직업이 없거나 직업이 있다 해도 결혼이나 출산계획을 세우지 않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아서다. 고마무라 교수는 “연금기금이 1년 치만 남는 2043년엔 노인빈곤율이 크게 올라갈 것”이라면서 “그때를 대비해 부자 증세 같은 방편도 생각해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보험료 고정시키되 수급액 줄여 재정안정”▼
2004년 도입한 ‘거시경제 슬라이드’ 제도의 의미
일본 국립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의 야마모토 가쓰야 사회보장기초이론연구부 부장(사진)은 현재 일본 연금제도의 토대가 된 2004년 연금 개혁의 의미에 대해 “7년 전인 1997년 정부가 국민에게 연금 개정에 대한 동의를 구하면서 준비를 했다”며 “연금 개정에는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당시까지는 연금수급액을 정하고 그에 맞춰 보험료를 거두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가 심화하는 사회구조에서 이 방식을 유지하다 보면 보험료율을 계속 높일 수밖에 없게 되자 변화는 불가피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월급에만 부과했던 보험료를 1999년부터는 월급에다 보너스의 1%를 보험료로 내도록 바꿨다.
야마모토 부장은 “2004년 개혁 때 ‘거시경제 슬라이드’를 도입한 것은 보험료를 고정시키고 연금수급액은 줄이자는 사회적 합의였다”면서 “‘수입에 맞는 지출’을 택함으로써 연금의 재정 안정성을 높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런 연금 개혁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정권을 잡고 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이 국민들에게 인기 있던 정권이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야마모토 부장은 또 “한국 역시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심각한 데다 일본과 달리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일본과) 비슷한 방향으로 개정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 연기금이 세계 최대 규모로 커질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1942년 사업장 남성근로자를 대상으로 노동자연금보험법을 실시하면서 공적연금 제도가 시작됐고, 인구보너스(생산연령층이 많아 경제가 성장하는 상태) 시대였기 때문에 기금이 충분히 커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의 공적연금기금에 대해 “연금재정 확충을 위해선 보험료를 올려야 하지 않을까”라면서 “인상분에 대해선 사회적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