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찍한 공간 천장에 수십 개 조명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 자동차를 비추고 있었다. 조명마다 반투명한 막으로 가릴 수 있게 돼 있었다. 이 기계는 태양열을 재연하는 장비다. 맑은 날과 구름 낀 날씨는 물론이고 위치를 바꾸며 일출과 일몰 등 날씨 상황을 재현할 수 있다.
최근 기자가 찾은 이곳은 자동차 공조·열관리 시스템 업체 한온시스템의 대전 연구센터에 있는 환경풍동실. 실제 주행상태를 재현해 혹한 또는 혹서 환경에서도 완성차에 장착된 부품들이 제 기능을 하는지 실험하는 설비다. 태양열뿐 아니라 습도, 4륜 구동 제어를 비롯해 달릴 때 발생하는 주행 풍속도 발생시킬 수 있다. 풍속은 시속 250km까지 낼 수 있다. 승용차,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은 기본이고 소형버스, 3.5t 트럭까지도 실험이 가능하다.
한온시스템은 대전 연구센터를 올 상반기(1∼6월)에 크게 보강했다. 국내 자동차 경기가 최악으로 치달을 때였지만 새로운 투자를 감행한 것이다. 최근 자동차 부품사들은 완성차 생산량이 줄면서 실적이 곤두박질치고 연쇄 도산 위기에 놓여 있다. 한온시스템은 위기 속에 선방 중이다. 지난해 4684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해 전년도에 비해 10.9% 증가했다. 현대·기아자동차 실적 부진의 여파로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이 15% 정도 줄긴 했지만 이는 다른 상장 부품사들의 평균치인 38.7% 감소 폭에 비하면 선방한 수치다. 최근에는 1조3800억 원을 들여 세계 3위 자동차 부품사인 마그나인터내셔널의 공조사업 부문을 인수했다.
한온시스템은 공조 분야에 특화해 꾸준히 연구개발(R&D)에 투자해 온 것이 위기 속에 선방한 이유로 꼽았다. 전기차·자율주행차 등 미래 자동차 부품 시장에도 한발 앞서 뛰어들었다.
지난해 한온시스템은 매출의 4.6%에 달하는 2590억 원을 R&D에 투자했다. 이렇게 마련한 주요 시설로 전자파 적합성을 실험하는 ‘전자파적합성 시험실(EMC)’, 소음 시험 공간인 ‘무향실(NVH)’ 등이 있는데, EMC는 국제공인시험기관으로 지정됐고 NVH는 국내 최대 수준이다. 이런 시설을 바탕으로 단순히 개별 부품만을 생산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각 부품이 서로 연결되고 실제 자동차에 장착돼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 공급 능력을 갖추게 됐다.
한 업체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한온시스템의 고객사 중 현대자동차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정도다. 마그나 공조사업부문 인수가 완료되면 30%대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는 포드와 다른 업체들이 차지한다. 현대차그룹의 부진에도 결정적인 타격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다.
자동차업계에서는 한온시스템 외에도 테슬라에 히트펌프를 납품하면서 성장하고 있는 우리산업, 전기차 영역에 진입해 성장 중인 삼화콘덴서, 대시보드 부품 국내 점유율 1위 세원정공, 오일실 부문 세계 4위 한국SKF씰 등을 산업 위기를 극복하고 있는 곳으로 꼽는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이런 업체들의 공통점은 핵심 부품에 특화돼 있고 전기차 등 새로운 분야에 진입하며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반대로 기존 시스템에 묶여 고객사 한 곳과 전속거래를 해 온 업체들은 직격탄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도 “한국 자동차 산업의 특징인 수직계열화로는 더 이상 부품사들이 살아남기 힘들다. 해외시장 개척과 기술혁신에 도전하는 부품사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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