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금융이 강한 경제를 만든다]3부 이제는 ‘포용적 금융’ 시대
<2> 기술력에 투자 ‘모험자본’ 절실
환경 관련 신소재를 개발하는 중소기업 ‘알무스이앤티’는 2014년 서울시가 진행한 지하철 초미세먼지 저감사업 입찰에 참여해 26개 업체 중 당당히 1위로 사업을 따냈다. 이 회사의 장윤현 대표와 연구원들이 7년여의 노력 끝에 개발한 신소재 ‘전도(傳導) 유리’ 덕분이었다. 전기가 통하는 이 신소재 유리는 전동차 내 초미세먼지를 20% 이하로 낮췄다. 오존을 방출하고 단가가 비싼 기존 전도 유리의 단점도 극복했다.
서울시 프로젝트의 성공에 힘입어 알무스이앤티는 지난해 5월 가정용 미세먼지 제거기 ‘에어젠큐’도 개발했다. 에어젠큐를 양산하는 데 5억 원이 필요했던 장 대표는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은행들은 하나같이 “회사 담보가 없어 대출이 힘들다”며 거절했다. 장 대표는 “결국 지인에게 어렵게 돈을 빌려 제품 6000개를 생산했다. 은행들은 중소기업의 기술력은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며 답답해했다.
○ “생산적 금융 확대” 한목소리, 하지만 현실은 ‘우산 뺏기’
국내 금융회사들이 ‘포용적 금융’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담보가 부족한 중소·벤처기업에도 기술력과 미래 가치를 따져 자금을 지원해주는 ‘생산적 금융’에 앞장서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동아일보가 금융권 최고경영자(CEO) 6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포용적 금융을 위해 “생산적 금융을 확대해야 한다”는 응답이 65%(복수 응답)로 가장 많았다. 서민금융 지원 확대(32%), 일자리 창출(15%) 등의 답변을 제친 결과였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딴판이다. 대다수 중소·벤처기업은 담보와 보증에만 의존해 돈을 빌려주는 금융권 대출 관행 때문에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한다. 한 벤처기업 관계자는 “담보가 없으면 은행에서 돈 빌리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했다.
이는 통계로도 여실히 드러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은행권이 취급한 중소기업 대출 가운데 담보 및 보증부 대출 비중은 71%나 됐다. 이 비중은 2013년 63.5%에서 매년 증가하고 있다. 담보가 충분히 있거나 보증을 선 공공기관이 대출을 대신 갚아줄 수 있는 중소기업에만 은행이 돈을 빌려줬다는 의미다.
많은 중소·벤처기업은 담보 가치가 떨어지거나 재무 상태가 나빠지면 금융사들이 대출을 거둬들이는 ‘우산 빼앗기’에 시달린다고 입을 모은다. 연매출 700억 원을 올리던 경남의 한 제조업체도 최근 경기 불황으로 수억 원의 적자를 내자 곧바로 대출 200억 원에 대한 만기를 1년에서 6개월로 줄인다는 통보를 받았다.
뛰어난 기술력이나 사업 아이디어가 있어도 성장 가능성을 보고 자금을 융통해주는 금융회사들이 없다보니 한국에선 창업에 나서기도, 창업·혁신기업이 성장하기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이런 환경 탓에 국내 창업기업이 매출 1000억 원을 달성하기까지는 17.4년이 걸리는 것으로 집계됐다.
○ “모험자본, 해외처럼 키워야”
은행권 중심의 기업 자금 조달 시장을 다변화하고 혁신기업에 대한 자금 수혈이 원활할 수 있도록 에인절투자, 벤처캐피털 같은 ‘모험자본’을 육성해야 한다는 지적도 오래전부터 제기됐지만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신규 벤처투자 규모는 1조6000억 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0.19%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미국(0.37%), 중국(0.28%) 등은 이 비중이 한국보다 훨씬 높았다. 특히 전체 벤처투자 가운데 창업 3년 이내의 초기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은 2016년 37%에서 올 상반기 30%로 오히려 줄었다.
이와 달리 금융 선진국에서는 창업·혁신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넘어 혁신기업을 발굴해 창업 멘토링을 해주고 대형 금융회사의 투자까지 연계해주는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가 확산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액셀러레이터 ‘500스타트업스(500Startups)’는 현재까지 60개국 2000여 개의 창업기업에 모험자본을 투입했다. 이 회사는 컨설팅 비용만으로도 연 34억 원가량의 순이익을 올린다. 미국의 지난해 신규 벤처투자 규모는 972조 원을 넘어섰다. 박희원 KDB산업은행 미래전략개발부 연구원은 “한국도 창업기업의 성장을 가속화할 액셀러레이터, 마이크로 벤처캐피털 같은 새로운 모험자본을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중소기업, 스타트업의 기술력과 성장 가능성을 평가해 자금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금융권이 함께 만들어야 한다”며 “이렇게 투자해서 실패하면 정부가 세제 혜택 등으로 투자금의 일부를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성모 mo@donga.com·조은아 기자
※ 특별취재팀
▽팀장 정임수 경제부 차장 im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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