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국민연금… 돈 굴릴 인재 떠나고 투지도 실종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6일 03시 00분


[강한 금융이 강한 경제 만든다]4부 금융이 커야 富도 자란다
<1> 불안한 국민 노후자산 관리


세계 연기금의 모범으로 꼽히는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는 올 8월 중국의 물류시설을 50억 달러(약 5조5500억 원)에 사들인 데 이어 지난달 유럽 물류회사에 4억5000만 유로(약 5700억 원)를 투자했다. 전자상거래 성장세를 기반으로 전 세계 물류시장이 확대될 것을 기대한 베팅이었다.

캐나다연금의 기금 운용을 전담하는 CPPIB는 ‘수익률 극대화’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미국 금리 인상 등의 여파로 신흥국 금융 불안이 계속되고 있지만 최근 마크 머신 CPPIB 회장은 “2025년까지 펀드 투자의 33%를 신흥국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공격적 투자에 힘입어 CPPIB는 올 상반기(1∼6월) 6.6%의 수익을 올렸다. 이 기간 한국 국민연금의 기금운용 수익률은 고작 0.9%에 그쳤다.

해외 주요 연기금들은 이처럼 적극적으로 위험 자산과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며 운용역량을 높이고 있다.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공격’ 전술이 연금 가입자의 노후 자산을 지키는 최선의 ‘수비’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 굴릴 인재들이 줄줄이 떠나는 한국의 국민연금은 수익률 방어에만 치중하며 국민의 부(富)를 지키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의 자산을 불리기 위해 금융산업을 키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덩치 커졌지만, 돈 굴릴 인재는 떠나

5일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기금운용본부 운용역 정원 278명 가운데 47명이 공석이다. 올 들어서만 운용전략실장, 대체투자실장 등 20여 명이 짐을 쌌다. 현재 20명의 채용 절차가 진행 중이지만 정원을 채우기 버거운 실정이다. 전북 전주로 이전한 뒤 우수 인력이 외면하고 세계 금융시장과 격리된 ‘갈라파고스’가 된 국민연금의 현주소다.

조직을 떠난 운용역들은 “온전히 투자에만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입을 모은다. 올해 퇴사한 A 씨는 “기계적으로 자산을 배분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해외 연기금은 민간 운용사와 경쟁해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모이는 반면에 국민연금은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만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는 기금운용본부에 대한 외부 간섭이 많고 이를 차단할 장치는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국민의 노후 자산 654조 원을 굴리는 기금운용본부는 공단 이사장과 보건복지부 장관, 이사회의 지휘를 받는다. 기금운용본부장(CIO)은 선임 과정부터 정부 입김이 반영되는 데다 임기도 최대 3년으로 짧아 소신껏 중장기적 투자 전략을 세우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이와 달리 CPPIB, 유럽 2위 규모 연기금인 네덜란드 공적연금(ABP) 등 선진국 주요 연기금들은 정부와 완전히 분리된 독립 기관으로 기금 운용을 전담하고 있다.

○ 대체투자 늘리고, 외부 운용사 역량도 높여야


국민연금이 안전자산에 치중한 보수적 투자로 노후자산 관리라는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많다. 9월 말 현재 전체 운용기금의 50.6%가 안전자산인 채권에 묻혀 있다. 주식과 대체투자 비중은 각각 38.2%, 10.8%에 그친다.

글로벌 연기금 중 채권자산 비중이 50%가 넘는 곳은 국민연금과 프랑스정부연기금(FRR)뿐이다. 채권 비중이 30% 수준인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등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향후 30년간 연평균 7%의 수익률을 유지하는 목표를 세웠다.

국민연금도 대체투자 비중을 2023년까지 15%로 늘릴 계획이지만 보수적인 투자 관행은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해외 인프라에 수조 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세워도 투자할 수 있는 손과 발이 없다”고 지적했다.

국민연금의 수익률 부진은 국내 금융사의 실력 부족이 맞물린 결과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연금은 전체 자산의 38.8%를 외부 운용사에 위탁 운용하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국내주식 위탁운용 수익률은 시장의 기준수익률에 1.51%포인트 못 미쳤다. 수수료를 주고 돈을 맡겼는데 시장 기준보다 떨어지는 성적표를 받은 것이다. 기금운용평가단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국민연금 나눠 먹기에 급급한 자격 미달의 운용사들을 걸러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산 배분, 연도별 운용 계획 등을 결정하는 기금운용위원회의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연강흠 연세대 교수는 “기금운용위가 복지부 장관 등 금융투자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구성돼 전문성이 크게 떨어진다”고 말했다.

기금운용평가단장을 지낸 신성환 홍익대 교수는 “국민연금의 고갈을 막기 위해서는 투자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투자 수익률을 1% 높이는 것이 보험료율을 2% 높이는 것보다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기금운용 수익률을 매년 1%포인트 올리면 기금 고갈 시기를 6년 늦출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특별취재팀

▽팀장 정임수 경제부 차장 imsoo@donga.com
▽경제부 김재영 조은아, 런던=김성모, 시드니·멜버른=박성민, 싱가포르=이건혁, 호찌민·프놈펜=최혜령 기자
▽특파원 뉴욕=박용, 실리콘밸리=황규락, 파리=동정민, 베이징=윤완준, 도쿄=김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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