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2년 전까지 서울 명동과 강남역 일대를 비롯해 전국 번화가에서 가장 임대료가 높은 점포를 차지했던 이름들이다. 한때 번화가는 ‘한 집 건너 화장품 가게’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K-뷰티’ 열풍을 이끌었던 화장품 로드숍(원브랜드숍)을 찾기 쉽지 않다. 그 빈자리를 올리브영이나 롭스 같은 편집숍(H&B)이 채우고 있다.
특히 ‘1세대 로드숍’의 대표주자였던 스킨푸드가 기업회절차(법정관리)에 돌입하면서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업계 1,2위인 이니스프리와 더페이스샵도 ‘몸집 줄이기’에 나서는 등 로드숍 몰락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편의점 업계보다 더 심각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 화장품 로드숍, 올헤 들어서만 800개 이상 줄어…하루 3개 이상 문 닫았다
화장품 로드숍의 현주소는 숫자를 통해 확인된다.
8일 관련 업계와 공정거래위원회 가맹정보시스템에 따르면 더페이스샵과 이니스프리, 네이처 리퍼블릭, 미샤, 토니모리, 스킨푸드 등 주요 로드숍 브랜드의 매장 수는 2015년말 4868개에서 2016년말 4934개로 1.36% 증가했다. 하지만 2017년에는 4775개로 3.22% 감소했다.
올해 들어서는 로드숍 감소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올 3분기 말 이들 업체의 매장 수는 4000~4100개로 추정된다. 9개월 만에 800~900개 매장이 줄어든 셈이다. 하루에만 3개 이상 문을 닫았다는 얘기다. 지난해 말과 비교하면 약 14~16% 줄어든 것으로 2016년말과 비교하면 17~19% 감소한 수준이다.
사실 화장품 로드숍은 2000년대초 중저가화장품 바람이 불면서 우리나라서만 특화된 유통채널로 등장하면서 오랜 기간 시장을 지배했다. 해외선 여러 브랜드의 제품을 파는 ‘뷰티 편집숍’이 일반화됐지만 우리나라는 ‘가성비’를 추구하는 소비 트렌드와 명동 거리에 몰려든 ‘중국인 관광객(유커)’에 힘입어 로드숍 전성시대가 꽤 오래 이어졌다.
그러나 화장품 유통 구조가 올해 들어 급변했다. 위기는 예견됐지만, 방아쇠를 당긴 건 중국발 ‘사드여파’였다. 지난해 3월 중순부터 중국인 단체관광객의 발길이 끊기면서 원브랜드숍을 지탱해 주던 고객층이 사라졌다. 이런 가운데 국내 소비자들은 온라인과 편집숍으로 발길을 돌렸다.
업계 한 관계자는 “화장품 로드숍은 미샤가 중저가화장품으로 ‘3300원 신화’를 쓰면서 우리나라에서만 특별히 발달한 채널”이라며 “시대가 변하면서 가격은 온라인몰에, 다양성과 체험 부분에선 편집숍에 밀리는 샌드위치 신세에 딱 놓였다”고 설명했다.
◇스킨푸드 ‘법정관리’… 실적 악화 도미노
이같은 유통채널 구조의 급변은 그대로 로드숍 브랜드의 실적 악화로 이어졌다. 최초 로드숍 ‘미샤를 보유한 에이블씨엔씨 매출은 2012년 3836억원(연결 기준 4523억원)으로 정점을 찍은 후 점점 줄어 지난해 3322억원(3733억원)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급기야 올해 들어선 상반기 연결기준 64억4800만원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적자로 전환했다.
스킨푸드는 지난해 영업손실 98억원을 기록하며 4년 연속 적자를 냈다. 매출도 1269억원으로 전년 1690억원 대비 25% 줄었다. 스킨푸드는 결국 협력업체들에 줘야 할 20억원대 대금과 29억원대 채무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황이다. ◇온라인몰 화장품 구매&역직구 ’쑥쑥‘, 로드숍 업계와 ’희비‘
전문가들은 로드숍 브랜드들의 위기는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문제라고 진단한다. 유통 구조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급격히 전환되고 있는 데다 경쟁력을 갖춘 편집숍들이 사업을 확대하면서 로드숍이 설 자리는 점점 줄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서도 온라인몰서 화장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온라인몰에서의 화장품 구매는 전년대비 20% 정도 늘어 침체에 빠진 로드숍 업계와 대조됐다. 통계청의 ’2018년 9월 온라인쇼핑동향‘에서 화장품의 온라인쇼핑거래액은 8302억원으로 전년 동월 6940억원에서 19.6% 늘었다. 5월 온라인쇼핑동향에선 화장품 거래액이 전년 동월 대비 32%나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해외 온라인몰에서의 K-뷰티 구매액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 따르면 중국인들이 온라인몰에서 사들인 K-뷰티 규모는 2014년 2035억원에서 지난해 1조9897억원으로 3년 만에 9.8배 폭증했다. 2015년~2016년 각각 3배, 2.4배씩 대폭 증가한 영향이다. ’사드 후폭풍‘이 컸던 지난해에도 전년대비 36.2% 증가하면서 성장세를 이어갔다. 올해 3분기 역직구 금액은 6740억원으로 전년동기대비 18.3% 증가했다.
헬스&뷰티숍(H&B)과 뷰티편집숍의 시장 규모 역시 급격히 커지고 있다. 2010년 H&B 시장은 2000억원대에 불과했지만 지난해는 1조7000억원으로 7년 새 8.5배 성장했다. 하나금융투자는 헬스&뷰티숍 시장 규모가 2025년에는 4조5000억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헬스&뷰티숍은 접근성을 바탕으로 젊은 여성들이 편의점만큼 자주 찾는 채널로 자리 잡았다. 현재 CJ올리브영이 약 1100여개 매장을 보유했다. 전체 헬스&뷰티숍 및 뷰티편집숍 시장의 과반을 차지해 압도적인 1위다.
후발사업자로 나선 롯데와 신세계는 각각 헬스&뷰티스토어 ’롭스‘와 뷰티편집숍 ’시코르‘를 앞세워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GS리테일은 AS왓슨지분을 전량 인수한 후 ’왓슨스‘를 ’랄라블라‘로 바꾸고 부문간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있다.
◇격변기 맞은 로드숍 브랜드들, 살길 찾기도 ’각양각색‘
이와 같은 시장 상황에서 브랜드숍 본사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서고 있다. 조직 개편 및 해외시장 공략을 시작으로 직영몰 강화, 자사편집숍으로의 전환, 헬스&뷰티숍 및 편집숍 입점, 대대적인 브랜드 리뉴얼 등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먼저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최근 조직 개편을 단행하며 ’e커머스 분야‘ 강화에 나섰다. 화장품 유통구조 변화를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유연하게 대응한다는 전략이다.
아울러 이니스프리, 에뛰드, 아리따움 등 가맹점주들과 ’상생안‘을 찾기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 온라인몰 수익을 가맹점주와 공유하겠다고 점주 측에 제안해 잠점 합의에 이르렀다. 현재 저수익 매장 지원과 온라인몰 구매 제품의 매장 교환·배송 등을 협의 중이다.
LG생활건강은 채널 변화를 일찌감치 읽고 더페이스샵을 자사편집숍인 네이처컬렉션으로 전환한다는 나름의 ’승부수‘를 띄웠다. 하지만 일부 점주들의 반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에선 더페이스샵과 네이처컬렉션 매장 모두를 철수했다. 이에 로드숍 대신 역대급 실적을 내는 럭셔리 부문의 ’후‘ ’숨‘ ’오휘‘ ’빌리프‘ 등에 더욱 집중하는 전략을 펼칠 전망이다.
토니모리는 ’세포라‘ ’부츠‘ 등 세계적인 뷰티편집숍에 입점에 집중하고 있다. 잇츠스킨(잇츠한불)은 중국 후저우 공장 가동과 ’달팽이크림 생산허가‘를 발판 삼아 ’왕홍‘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중국 공략에 다시 집중하고 있다. 에이블씨엔씨를 인수한 사모펀드 운용사 IMM프라이빗에쿼티는 유상증자와 사내유보금을 활용한 2289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히며 브랜드 리뉴얼을 통한 정면 돌파에 나서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로드숍이 어려운 이유는 브랜드가 너무 많아지면서 경쟁이 치열해진 데다 온라인몰과 홈쇼핑 등이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기 때문”이라며 “온라인과 편집숍, 홈쇼핑 등 다 분화된 채널들이 로드숍 점유율을 빠르게 빼앗는 흐름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여성들이 화장품을 구매할 때 직접 발라 본 후 구매하길 원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브랜드가 다양해지고 온라인 가격이 내려가면서 로드숍보단 다수 브랜드를 한 번에 접할 수 있는 편집숍과 온라인몰을 선호하는 추세가 짙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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