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빅데이터로 신용평가해 대출… 한국선 기술있어도 못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13일 03시 00분


[강한 금융이 강한 경제 만든다]5부 금융 신산업에 기회 있다
<2> 국회에 발목잡힌 규제혁신


개인 간(P2P) 대출을 해주는 벤처기업 ‘크레파스’는 스마트폰의 배터리 충전량, 통화 패턴, 애플리케이션 업데이트 주기 등을 분석해 고객의 신용등급을 산출한다. 스마트폰 사용 정보를 분석해 고객이 약속을 잘 지키는 성향인지, 생활이 안정적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은행 대출 문턱을 넘지 못하는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들이 이렇게 신용평가를 받아 돈을 빌릴 수 있다.

이런 신용평가 기법은 선진국에서 보편화됐지만 국내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신용정보법이 금융회사가 빅데이터를 공유하고 분석하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크레파스는 당초 유통, 통신 등 비(非)금융 정보들을 결합해 대출 상환 가능성을 정교하게 평가할 계획이었지만 법에 가로막혔다. 김민정 크레파스 대표는 “신용정보법이 서둘러 개정돼야 금융회사들이 다양한 데이터를 결합해 혁신적인 금융 서비스를 선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 신산업을 뒷받침할 ‘금융혁신’ 법안이 줄줄이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급변하는 금융환경 변화에 발맞춰 정부가 규제 빗장을 풀려고 해도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반발에 발목이 잡혀 허송세월하고 있다.

○ 이념 다툼에 발목 잡힌 ‘혁신법’

문재인 대통령은 8월 말 ‘데이터경제 활성화 규제혁신’ 간담회를 열고 “데이터경제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우리도 신속하게 전략을 세워나가야 한다”며 데이터규제 3법(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법) 개정에 힘을 실어줬다.

이 법들을 개정해 추가 정보 없이는 개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가명정보’를 공익적 연구에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을 알아볼 수 없는 ‘익명정보’를 규제 대상에서 제외해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터주자는 취지였다.

당정도 지난달 3법 개정에 합의했다. 개인정보 유출을 우려한 시민단체의 반발을 반영해 ‘개인정보보호위원회’를 격상하는 내용도 개정안에 포함했다.

하지만 3법 중 어느 하나도 7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했다. 시민단체의 반발이 계속된 데다 구체적인 방안을 두고 여야는 물론이고 여당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서다. 반대 진영에서는 “정보보호 장치가 약하고 가명정보를 산업적 연구에 활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맞서고 있다.

신기술을 활용한 서비스나 제품에 대해 ‘우선 허용, 사후 규제’를 하도록 한 행정규제기본법도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개정 법안은 법안 소위만 네 차례 거쳤지만 도돌이표다. 일부 야당 의원이 “규제가 과다하게 완화돼 국민의 안전, 생명, 건강, 환경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부처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금융혁신 법안을 두고 국회에서는 찬성파와 반대파 의원들이 서로 일방적인 주장만 펼치며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정치권, 시민단체 설득 나서야”

규제혁신 법안들이 국회에서 발목 잡힌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혁신 핀테크 기업에 규제를 2년간 면제해주는 ‘금융혁신지원특별법’은 이달 초 겨우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혁신성장전략회의에서 강도 높은 규제혁신을 주문한 뒤 1년이 넘게 걸렸다.

‘은산분리’(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 제한) 규제를 완화하는 인터넷전문은행특례법도 진영 다툼 속에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올 9월에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당시 은산분리 완화를 반대하던 민주노총과 정치권 일부에서는 “문 대통령은 박근혜 정권의 계승자”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정쟁에 갇혀 금융혁신 법안들이 표류하는 사이 선진국은 규제혁신에 속도를 내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에선 이제 막 물꼬를 튼 ‘규제 샌드박스’는 이미 선진국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영국은 2016년부터 혁신 기업에 6개월 동안 규제를 면제해 인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지금까지 89개 기업이 규제 샌드박스 적용을 받았다. 싱가포르도 2년 전부터 일정 요건을 갖춘 기업을 대상으로 규제를 완화해주는 샌드박스 제도를 도입했다. 일본은 지난해 정부가 지정한 전략 거점에서 규제를 풀어주는 ‘지역특구형’ 샌드박스를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금융사들이 4차 산업혁명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정치권과 시민단체를 설득해 규제혁신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손경호 강원대 교수는 “빅데이터 규제 완화와 관련해서도 정부가 충분한 예산을 투입해 개인정보 관련 연구를 한 뒤 제대로 된 근거를 갖고 시민단체를 설득하지 않으면 논의가 계속 제자리를 맴돌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승주 고려대 교수는 “정치권이든 시민단체든 ‘안 된다’고만 주장할 게 아니라 대안을 갖고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 특별취재팀

▽팀장 정임수 경제부 차장 imsoo@donga.com
▽경제부 김재영 조은아, 런던=김성모, 시드니·멜버른=박성민, 싱가포르=이건혁, 호찌민·프놈펜=최혜령 기자
▽특파원 뉴욕=박용, 실리콘밸리=황규락, 파리=동정민, 베이징=윤완준, 도쿄=김범석
#빅데이터#대출#신산업#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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