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가’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의 뚝심

  • 뉴스1
  • 입력 2018년 12월 21일 06시 09분


먹튀·경영권 보장 논란에도 뚜벅뚜벅 정면 돌파
中 GM 美로 옮기라는 트럼프에 ‘협상의 기본’ 훈수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22일 서울 중구 중소기업은행에서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업무보고하고 있다. © News1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22일 서울 중구 중소기업은행에서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업무보고하고 있다. © News1
한국지엠(GM) 연구개발 법인 분리를 둘러싼 소송전이 일단락되면서 ‘협상가’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의 뚝심이 주목받고 있다. 한국GM 노동조합의 반발 등 과제가 남아 있지만, 한국GM 연구개발 법인을 중점 연구개발 거점으로 지정하도록 한 성과는 전혀 가볍지 않다는 평가다.

GM과 산업은행 간 법인 분할 협상 타결은 극적으로 이뤄졌다. 지난 5월 71억5000만달러(7조7000억원)의 자금투입으로 마무리됐던 GM 사태는 10월4일 한국GM의 연구개발 법인(‘지엠테크니컬센터 코리아’) 분할 결정으로 재점화됐다. 신차 물량 배정과 아태 지역본부 유치 등의 약속에도 R&D 법인 분리가 결정되면서 한국GM의 지속가능한 경쟁력에 의구심이 제기된 탓이다.

지난 11월26일에는 GM 본사가 북미지역에서 1만4800명의 인력을 감원하고, 미시간주와 오하이오주 등에 위치한 5개 공장의 생산 중단 등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흑자를 내는 북미 공장의 문을 닫는 상황에서 적자투성이 한국GM의 미래를 장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1월28일 나온 서울고등법원의 한국GM 분할 주주총회 효력정지 결정이 나왔고, 이 회장은 이를 적절히 활용했다. 때마침 G20 정상회담 직후인 12월4일 배리 앵글 GM 총괄 부사장 겸 해외사업부문(GM International) 사장이 산업은행을 찾았다. 결과는 대타결이었다. GM은 추가자료를 제출하고 산업은행은 법인 분할에 찬성했다. GM은 추가로 중국에 있는 CUV 중점 연구개발 거점을 한국으로 돌리기로 했다.

사실 이 회장 주도의 산업은행 협상팀은 고립돼 있었다. 여론은 GM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한번 불거진 먹튀설은 웬만해선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GM은 10년간 생산을 보장하겠다고 합의했지만, 10년 후에는 철수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연구개발 법인 분리 문제가 불거지자 불신은 더 커졌다.

그렇지만 이 회장은 의연했다. 노사에 3자 대화를 제의했고, 먹튀 여론에는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산은이) 8000억원을 손해 볼 때 (GM은) 최대 4조~7조원의 손해를 보는데, 이런 것이 어떻게 먹튀가 되느냐”고 꼬집었다. 산업은행과 GM이 공동으로 유상증자에 참여해 경영을 정상화를 하기로 했는데, 마치 GM이 돈만 받고 철수할 것이라는 비상식적인 논리라는 반박이다. 더구나 1년 후를 내다보기 어려운 경영 환경에서 10년간 경영을 보장하라는 주장은 생떼나 다름없다.

이 회장은 한국GM 노조를 향해서도 정론을 펼쳤다. 그는 “노조에서 10년 뒤 경영권 보장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파업한다고 하는데, 경영 정상화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라면서 “노조도 사측과 마찬가지로 경영 정상화의 책임 있는 주체 중 하나인데, 자기들은 책임이 없고 사측과 정부에서 (경영권을) 보장해주라는 임플리케이션(Implication)을 주게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먹튀 여론과의 정면 투쟁, 노조 설득 등에 나서면서도 GM에 대해서는 강온 전략을 동시에 구사했다. GM 본사가 북미 공장을 폐쇄하는 상황에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한국GM에 불똥이 튈 우려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가처분 신청을 통해 GM을 협상장으로 끌어내는 한편으로 자금지원을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해 GM측의 양보를 받아내는 전략이었다. 협상 결과로 얻어낸 것이 중국에 있던 중점 연구개발 거점의 한국 이전이었다.

중국 공장을 폐쇄하고 미국으로 옮겨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직후여서, 연구개발 거점을 중국에서 한국으로 옮긴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은 법원의 가처분 인용과 G20 정상회담 직후의 화해 무드를 십분 활용했다.

깐깐한 금융 선비로 알려진 이 회장의 협상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는 한국GM의 2대 주주(지분율 17.02%)로서의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고서 협상에 임했다. GM은 단순한 미국 자동차 회사가 아니다. GM 뒤에는 미국 정부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는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거래 상대방(카운터파트)이 있는데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협상을 못 했느냐고 하는 건, 계약하지 말라는 것이다. 앵글이랑 마지막으로 얘기할 때 밑에서 많은 조건 걸러서 주고받았다. 이건 못 주고 저건 받고 이런 식으로 10년의 비토권과 경영권 보장받으면서 준 것도 있다. 그게 협상의 기본이지”라고 말했다. 거래의 기술자 이동걸의 재발견이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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