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으로 폐업하는 소규모 제조업…설 곳 잃은 ‘메이드인코리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24일 19시 14분


“월급 주고 납품비 맞추려고 가족 명의로 대출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사채까지 썼습니다. 얼마 전엔 개인파산까지 신청했어요. 최저임금 인상안을 조정하기는커녕 이번에 주휴수당까지 포함시킨다니요. 정부는 과연 눈과 귀가 있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가방 모피 의류 등 봉제공장 1만 여 곳이 밀집한 서울 중랑구에서 45년간 봉제업에 종사한 김동석 씨(58)는 사무실에서 대출을 알아보기 바빴다. 그가 운영하는 공장은 대기업이 디자인한 의류의 봉제 및 가공을 담당하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업체다. 직원 23명 가운데 최저임금을 받는 직원은 30~40년 호흡을 맞춰온 6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직원들은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다. 김 씨는 “최저임금을 맞추려면 4대 보험과 퇴직금까지 줘야하는데 그러면 1인당 260만 원이 넘기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하다”며 “대기업은 해외로 나가고 경기침체로 일감은 줄어 빚만 쌓이고 있다”고 토로했다.


● 설 곳 잃은 ‘메이드인코리아’

24일 소공인협회 등에 따르면 최저임금 인상의 타격은 숙련된 기술을 가진 인력의 비중이 큰 소규모 제조업체들이 가장 크게 받고 있었다. 이들 업체는 최근 줄줄이 공장을 접거나 30~40년 함께 일한 기술자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올해에 이어 내년 1월에도 닥칠 두 자리 수의 최저임금 인상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조업체들의 줄 폐업과 구조조정 때문에 통계청이 내놓은 11월 제조업 취업자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만1000명 줄었다.

중견급 이상 제조업체들이 인건비가 싼 해외로 떠나도 이들 소규모 제조업체들은 ‘메이드인코리아’를 지킨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제화 공장들이 250여 개 몰려있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도 최근 1년 새 공장들이 문을 닫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이 일대에서 금강, 무크 등 유명브랜드의 OEM 공장과 자체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박동희 씨(61)는 “수제화 공장 대표들은 해외로 떠나거나 사업을 접거나 두 가지 갈림길에 내몰렸다”며 “구두 브랜드마저 생산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면서 국내 수제화 생산 기반이 붕괴되기 직전”이라고 한탄했다. 박 씨는 “신발 1족 생산하면 2000~4000원정도 남는데 자고 일어나면 오르는 인건비를 어떻게 감당하겠냐”며 “공장과 매장을 운영해도 매출이 나오지 않아 구두제작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있다”고 말했다.


● 숙련된 인력 줄이고 노후자금 털어 기계 도입

무엇보다 수십 년간 숙련된 제조 인력이 생업에서 쫓겨나고 있다. 경기 파주시에서 40년 째 기계가공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김대구 대표는 최근 12명이던 직원을 8명이나 감축했다. 주로 30년 이상 숙련된 직원들이었다. 직원수를 유지했다간 2년간 30% 가량 높아진 인건비를 내년부터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마진율이 낮아지며 연구기술과 설비 투자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다”며 “기계 1대밖에 없는 소규모 가공사업장들이 살아남을 방법은 폐업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 신도림에서 식품기계제작 공장을 운영하는 엄천섭 대표는 “16년 넘게 함께 일했던 기술자를 12월 말일자로 해고했다”며 “60, 70대 기술자들은 여기서 나가면 어디서도 써줄 곳이 없어 안타깝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서울 중구에서 스포츠의류를 제작하는 세창스포츠 김창환 대표는 요즘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생 2명이 해왔던 라벨 붙이기와 커팅 작업을 손수 하고 있다. 김 대표는 내년 초 최저임금 인상에 대비해 직원 20명 가운데 수십 년 경력의 재단사와 커팅사 4명을 내보냈다. 대신 노후자금으로 모아놓은 1억2000만 원을 털어서 디자인과 커팅을 해주는 캐드(CAD) 기계를 구입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김 대표는 “최저임금 10%를 인상하면 사업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심리적 부담은 100% 이상”이라며 “매년 임금이 오를 것이라 생각하니 기계에 투자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판단했다”고 말했다.

전북 전주시에서 섬유공장을 운영하는 황주순 씨(56)는 “7, 8년 전 50명 수준이었던 인력이 지금은 10명도 안 된다”며 “최저임의 인상으로 산업 자체가 무너질 수 있는 우리 같은 영세업종은 기준을 차등 적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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