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규제철폐 앞장선 정조의 ‘현실감각’이 시장을 살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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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한양에 난전 엄격히 금지… 시장수요는 커져 가격왜곡 심화
정조, 현실에 맞춰 정책방향 바꿔… 민생해결-재정확대 모두 얻어

유교정치 사상은 무조건 보수적이기만 할까. 전통 가치와 제도를 중히 여긴다고 해서 무조건 과거를 답습한다는 뜻은 아니다. 유학의 기본 정신은 ‘지금 바로 여기에 가장 적합한 것(時中)’을 찾는 것이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정책 방향을 바꾸거나 혁신이 시도된 경우를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정조가 단행한 ‘신해통공(辛亥通共)’이 대표적 예다.

조선은 상행위를 국가가 엄격하게 관리했다. 정조가 처음 통치할 당시에도 한양 도성과 도성 밖 10리 지역에서 장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전안(廛案)이라는 명부에 등록된 시전(市廛) 상인뿐이었다. 등록되지 않은 상인이 물건을 판매하는 가게를 난전(亂廛)이라 칭했는데, 이들은 엄격한 단속을 받았다. 국가가 상인을 관리하지 않을 경우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기 위해 가격을 임의로 올리거나 물건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조도 초기엔 이 취지에 동의해 난전을 통제하고 시전을 보호하고 장려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시전 상인들에게 국고를 무이자로 대출해주고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했다.

하지만 이 엄격한 난전 통제 정책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시전 상인들의 독과점 행위가 나날이 심각해진 것이다. 이들은 시골 노파가 누룩을 만들어 파는 것과 같이 백성들이 일상에서 소소하게 사고파는 행위까지 규제하기 시작했다. 채소, 기름, 젓갈 같은 일상 품목까지도 난전에서 판매하는 것을 제재해 일반 백성들이 쉽게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시전 상인들이 단속을 구실로 난전 상인들이 가져온 면포 같은 물품을 빼앗아 나눠 갖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규제가 현실과 점점 동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은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수공업이 활발했다. 나라에 바치는 조세를 쌀로 통일한 대동법(大同法) 시행 이후 물품 구매를 대행하는 도고업과 화폐 유통도 촉진됐다. 사회적 부가 늘어나니 상품과 화폐 경제가 함께 성장했다. 그 결과 급성장하는 상거래 수요를 시전으로 제한한 시장만으로 받쳐주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1791년 정조는 기존 입장을 완전히 뒤집어 난전을 허용하는 신해통공 정책으로 선회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다. 그는 상소에 난전 상인들의 고충을 상세히 알렸고, 시전 상인들의 독과점으로 인한 가격 왜곡 현상도 지적했다. 그러면서 비단, 면포, 명주 등 청나라에 보내는 조공 물품 조달을 책임졌던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단속을 폐지하자고 제안했다.

신해통공 정책 이후 조선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난전 상인과 시전 상인의 경쟁이 시작되면서 상품의 질은 더욱 좋아졌다. 다양한 상업 구역이 형성되면서 백성들의 생필품 구입도 쉬워져 소비도 촉진됐다. 시장이 확대되자 조선은 새로운 세수를 확보해 재정을 늘릴 수 있었다. 모두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간 것이다.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대 연구교수 akademie@skku.edu
정리=이미영 기자 mylee0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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