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정오 서울 동작구 노량진의 한 고시촌. 전남 목포 출신인 경찰공무원(순경)시험 준비생 문모 씨(30)는 점심도 거른 채 ‘열공’ 중이었다. 그는 설 연휴에도 목포에 가지 않고 노량진 고시원과 학원을 오가며 공부했다. 문 씨는 “공시생은 설 연휴가 싫다. 상당수 식당이 문을 닫아 내내 편의점 도시락만 먹었다”고 털어놨다.
2년째 ‘공무원시험(공시)’을 준비하고 있는 신민정 씨(29·여)도 고향인 경북 경주에 가지 않았다. 4월 6일 9급 공무원 필기시험을 앞둔 그 역시 연휴 내내 오후 11시까지 공부했다. 신 씨는 “대기업 입사는 바늘구멍인 데다 설사 합격해도 오래 다니기 어렵다”며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르지만 붙을 때까지 공무원시험을 보겠다”고 했다.
이날 노량진 컵밥거리에는 가게마다 줄을 서서 컵밥을 먹는 공시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4월엔 9급 공무원 외에 경찰공무원시험(27일)도 있다. 두 달이 남은 지금 공시생들은 1분 1초가 아깝다. 노량진 지언독서실 직원 김모 씨는 “집이 수도권인 학생들도 설에 집에 가지 않고 하루 이용권을 끊어 독서실에 오더라”며 “설 당일인 5일 이용 인원이 평소보다 2배 이상 많았다”고 알려줬다.
지난해 3월 공개된 한 박사논문에 따르면 한국 공시생 수는 약 44만 명. 이 많은 젊은이들은 왜 공시에 목을 맬까.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이유는 ‘직업 안정성’이다. 신 씨는 “마흔 넘은 대기업 직원은 하루만 쉬어도 책상이 없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공무원은 박봉이지만 대기업보다 훨씬 안정적이지 않으냐”고 했다. 2년째 순경시험을 준비 중이라는 김모 씨(24·여)도 “공무원 채용을 늘리겠다는 정부 정책을 실감 못 하겠다. 학벌과 스펙이 좋은 경쟁자가 너무 많아 채용을 늘릴수록 경쟁률만 높아진다”며 한숨을 쉬었다.
유력 해외 언론도 이 현상을 주목한다. 특히 한국처럼 전국 단위의 공무원시험이 없는 서구 선진국에서는 더욱 생소하게 여긴다. 미국은 공공업무 종사자의 공석이 발생할 때 수시로 채용 공고를 내며, 지원자의 직무 관련 경험이나 과거 직장에서의 평판조회 등을 중시한다. 공무원뿐 아니라 사기업에서도 ‘공채’ 문화가 보편화된 한국과 다르다.
미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6일(현지 시간) 3면 머리기사로 “미 최고 명문 하버드대 입학보다 한국의 공시 경쟁이 더 치열하다”며 “한국의 경제성장이 느려지고 수출 주도 산업에서 중국과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젊은이들이 경기침체 여파를 받지 않는 공공직에 몰린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4953명을 최종 선발한 한 공무원시험에는 20만 명이 지원해 합격률 2.4%를 기록했다. 지난해 하버드대 지원자 합격률(4.59%)의 절반 수준이다. 이 신문은 삼성, LG 등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일자리 격차도 주목했다. 높은 학점, 외국어 능력 등 대기업에 인상을 남길 만한 이력서가 없는 젊은이들이 공시로 눈을 돌린다는 뜻. 이어 “문재인 정부가 1년 전부터 취업난 해소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내놨지만 청년 대다수는 민간 분야 일자리 전망이 금방 좋아질 것으로 기대하지 않아 공시 경쟁이 더 치열하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1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도 “한국은 과잉교육 사회(over-educated society)”라며 죽을 때까지 ‘공부의 연속’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진단했다.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시작에 불과하다. 대학 졸업 후에는 화이트칼라 직업을 얻기 위해 입사시험을 치러야 하고 입사 후에도 각종 승진 및 자격증 시험이 기다린다.
2017년 5월 미 공영라디오방송 PRI도 “20, 30대 한국 청년 중 3분의 2가 대학 졸업장을 소지했지만 대학을 졸업해도 삼성 같은 ‘꿈의 직장’에 입사한다는 보장이 없다. 이를 대체할 안정적 직장을 갖고 싶다는 욕구가 공시 열풍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또 “경제가 좋지 않아도 정부의 공무원 채용은 계속되며 한번 공무원이 되면 정년까지 일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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