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에서 20여 년간 자동차부품업을 하고 있는 자영업자 A 씨(45)는 4년 전 은행에서 5억5000만 원을 빌린 뒤 간신히 이자만 갚고 있다. 자동차 산업 불황에 일감이 생기지 않으니 은행 문을 계속 두드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빚이 줄지 않아 은행은 돈을 더 빌려주지 않는다. A 씨는 “평생 한 업종에서 일하며 연체 한 번 안 하고 이자를 성실히 갚고 있는데 은행은 돈이 필요해도 추가 대출을 안 해 준다”고 막막해했다.
조선, 자동차 등 주력산업의 ‘밑단’에서 일하는 자영업자들의 자금난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13일 정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받은 ‘국내 은행권 개인사업자(자영업자) 대출의 업종별 연체율’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현재 74개 업종 중 연체율이 가장 높은 업종은 수상운송업(2.69%)이었다. 이 업종 연체율은 2016년 말 0.74%, 2017년 말 1.91%였다가 지난해 2%대로 뛰어올랐다. 기타 운송장비 제조업(1.31%), 자동차 및 트레일러 제조업(1.09%), 인쇄 및 기록매체 복제업(1.04%), 가죽, 가방 및 신발 제조업(0.85%) 등도 연체율이 높은 편이었다.
연체율 상위권에는 주력 산업의 후방 업종과 산업의 ‘손발’이 되는 전단 제작업, 트럭배달업 등 경기 민감 업종이 집중됐다. 모두 ‘바닥 경기’를 잘 보여주는 업종들이다. 최근 수출과 제조업 부진의 부정적인 여파가 하청·부품업체 등 산업계 피라미드의 가장 아랫단부터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전기·수도사업 등 공공 인프라 관련 자영업은 연체율이 가장 낮은 편인 것으로 조사됐다.
부산 영도에서 예인선으로 선박을 나르는 수상운송 자영업자 B 씨는 2년 전부터 일감이 끊겨 2억 원을 빚내 생활비를 겨우 대고 있다. 조선업과 건설업이 어려워지니 기자재를 옮기던 선박이 계속 항구에 묶여 있다. B 씨는 “우린 한평생 바다에서 일해 육지에 가기가 어렵다”며 “업종 전환도 힘드니 정부가 고용위기 지역처럼 자영업자 취약 업종을 정해 만기를 늘려주고 이자도 낮춰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경기 민감 업종인 인쇄·복제업자들은 “매출이 5년 전에 비해 반 토막이 났다”고 입을 모았다. 경기 부진에 자영업자들이 광고 전단 제작을 줄이고 기업들이 경비 절감을 위해 종이문서의 사용량마저 줄여서다. 평소 같으면 3월 학기 시작을 앞두고 일이 밀려들었던 인쇄업 밀집 지역은 일감이 없어 썰렁해졌다.
서울 중구에서 인쇄업을 하는 C 씨(65)는 보험과 국민연금 납입을 줄줄이 끊었다. 그는 미소금융으로 1500만 원을 급한 대로 조달했지만 그래도 생활비가 모자라 지인에게 돈을 다시 빌려야 했다. C 씨는 “경기가 안 좋으니 기업들이 일을 안 주고 인터넷이 발전해 종이 인쇄에 대한 수요가 줄었다”며 “다른 일을 하고 싶어도 평생 이 일만 했으니 가게를 닫을 수가 없다”고 털어놨다.
전문가들은 사양산업에 속해 있는 자영업자들이 일찍 업종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 직업교육을 강화해 별다른 사업성 검토 없이 ‘묻지 마 창업’을 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태일 고려대 교수는 “고령화,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일부 산업의 사양화에 대비하려면 창업 전 충분한 컨설팅과 업종 전환 교육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경기 민감 업종에서 일하는 운수업자 D 씨(27)는 최근 일감을 잡기 위한 업종 내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고 말했다. 원청업체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놓치면 금방 다른 업체에 배송일을 빼앗긴다. 그는 “우리는 시간이 돈이기 때문에 은행에 가서 서류를 내고 심사받을 시간이 없다”며 “금리가 높은 걸 다 알고도 대출이 빠르고 간편한 카드론과 현금서비스를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음식점에 채소를 배달해 납품하는 운수업자 E 씨는 “정책금융상품이 여러 가지 있는 모양이지만 장사하느라 바빠 20년 넘게 일하는 동안 자금 신청을 딱 한 번밖에 못 했다”며 “우리 같이 바쁜 사람들한텐 내야 할 서류도 많아 ‘빛 좋은 개살구’”라고 말했다.
정재호 의원은 “자영업자 연체율이 업종마다 편차를 보이고 있으니 금융당국이 취약업종을 세심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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