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밍갈라돈 산업단지. 19일 찾아간 이곳 철강업체 프라임메탈의 생산라인에서는 쇳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포스코, 현대제철 등 한국 기업들이 수출한 철강 강판들이 절삭기와 용접기를 거쳐 건축용 H빔, 파이프 등으로 가공돼 쏟아져 나왔다.
포항제철(현 포스코)과 효성 등 국내 대기업에 몸담았던 윤현섭 사장은 일찌감치 미얀마의 성장세와 잠재력을 눈여겨봤다. 윤 사장은 군부 독재가 끝나고 미국의 제재가 하나둘 풀리던 2015년 이 공장을 세워 현재 미얀마 내수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윤 사장은 “철강 용접부터 효율적인 생산라인 관리까지 한국에서 익힌 노하우를 쏟아붓고 있다”며 “회사를 더 키우는 건 물론이고 기술학교도 세워 한국을 알리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 기업의 아세안 시장 진출은 전통 제조업은 물론이고 서비스업, 금융, 스타트업 등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인구 6억5000만 명을 거느린 아세안의 무한한 가능성과 한국 기업 특유의 개발·혁신 DNA가 결합돼 양측이 ‘윈윈’하는 새 경제벨트가 형성되고 있다.
○ 6억5000만 명 소비시장으로 변한 아세안
동남아 최대인 6만 m²(약 1만8000평) 규모의 공유 오피스를 운영하는 인도네시아 스타트업 ‘코하이브(COHive)’의 대표는 한국인 최재유 씨(41)다. 그는 2000년대 초 래퍼로 활동했고 유명 힙합그룹 에픽하이의 데뷔 앨범을 프로듀싱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지난해 한국 네이버, 일본 소프트뱅크벤처스 등 국내외 투자자로부터 2000만 달러(약 227억 원)를 유치하며 사업성을 인정받았다. 현재 코하이브 공유 오피스에는 700개 회사 8000명이 입주했다.
최 대표는 “10년 전 허허벌판에 대규모 빌딩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인도네시아의 잠재력을 느꼈다”며 “아직 부유하진 않지만 열정적인 인도네시아 창업가들이 꿈을 이루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과거 한국 기업에 아세안은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한 생산기지 정도로 인식됐다. 아세안에 공장을 세워 생산단가를 낮춘 뒤 한국이나 글로벌 시장에 납품하는 전략을 취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이 고속 성장을 거듭하며 그 자체가 새로운 소비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의 아세안 진출도 제조업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청소업체 ‘오케이홈’을 설립한 김대현 씨(34)도 기존 업체보다 가격은 높지만 품질 좋은 청소 서비스로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일반 가정집의 청소 신청을 받는데, 2017년 창업한 이래 6500건의 서비스를 진행했다. 김 대표는 “발전 속도와 인구를 고려하면 ‘프리미엄 청소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생각해 창업하게 됐다”며 “시장이 크다 보니 창업 기회도 많고 성공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 ‘창업 천국’ 아세안, 내수 시장도 크게 확대
아세안 국가들은 창업 기업을 좌절시키는 ‘규제의 벽’도 낮은 편이다. 경제발전 단계가 상대적으로 낮은 측면도 있지만 기업가 정신을 장려하는 정부의 규제 혁신 노력도 대단하다. 규제가 적은 데다 스마트폰 등 정보기술(IT) 보급 수준이 높아 스타트업들에 ‘창업 천국’으로 불린다.
1월부터 베트남 하노이에서 한국산업인력공단의 해외취업 프로그램 ‘K무브’ 수업을 듣고 있는 임도혁 씨(29)는 1인 물리치료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임 씨는 “한국에선 물리치료사 자격증을 따도 의료법 규제 때문에 1인 사업을 할 수 없는데 베트남은 이런 규제가 없어 창업이 가능하다”며 기대를 드러냈다. 그는 베트남에서 자기 이름의 물리치료센터를 여는 게 꿈이다.
최근 아세안의 성장은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진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따르면 올해 아세안 10개국의 성장률 전망치는 평균 5.2%다. 세계 평균(3.5%)이나 한국(2.6%)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한국과 아세안 간 교류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과 아세안 10개국의 교역액은 1597억 달러(약 181조5300억 원)로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750억 달러) 이후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금융회사들도 현지 영업을 강화하면서 이 지역에서 순이익을 계속 늘려 나가고 있다. 국내 금융회사들의 아세안 현지 점포 수는 지난해 6월 말 기준 162개에 이른다.
최근 수차례 아세안 국가들을 찾은 강방천 에셋플러스자산운용 회장은 “외국인 투자에 의존하던 아세안 국가들이 이제 중국처럼 자체 소비 여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세안 국가를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기업이 생기고 광범위한 내수 시장도 만들어지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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