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데오거리 뒷골목 건물 1층에 위치한 한 수제버거 식당은 낮 12시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66m²(약 20평) 크기의 가게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자리를 잡지 못해 가게 앞으로 줄을 선 손님 10여 명과 아쉬운 표정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로 골목이 분주했다.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퓨전 분식집과 인근 딤섬 레스토랑도 방문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 동네에서 10년 넘게 부동산을 운영해 왔다는 김모 씨(46)는 “몇 년 전만 해도 거리가 썰렁했는데 골목 안쪽으로 식당과 술집이 생기니 늦은 저녁시간 이후에도 사람들이 많이 다닌다”면서 “유동인구가 늘어난 게 최근 가장 크게 달라진 모습”이라고 말했다.
압구정로데오는 본래 1990년대 일본에 먼저 소개된 고급 브랜드 신상품이 실시간으로 들어오던 쇼핑가로 ‘멋을 좀 안다’는 패셔니스타들의 성지로 통했다. 또 80년대 말 국내 맥도날드 1호점이 들어설 정도로 유행의 선두에 섰던 동네다. 사람들을 일컫는 오렌지족과 야타족이 성행하던 곳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지금은 유명 의상실 대신 중저가 스트릿패션을 취급하는 ‘무신사’ 같은 온라인 쇼핑몰의 사무실이 늘어나면서 패션 성지의 명맥도 잇고 있다. 부동산 관계자들에 따르면 임대료는 저렴한 반면 패션의 중심지란 이미지는 남아있기 때문에 후광 효과를 노린 크고 작은 온라인 쇼핑몰들이 들어오고 있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압구정로데오가 포함된 청담 상권의 중대형 상가 임대가격지수(2017년 말 임대가격이 기준치 100)는 2013년 말 105.4에서 지난해 말 98.6까지 내렸다. 중대형 상가 공실률의 경우 2015년 10%대를 넘어섰지만 2017년부터 감소해 지난해 3분기까지 2%대로 줄었다. 반면 가로수길이 포함된 신사역 상권 중대형 상가 임대가격지수는 지난해 105.5∼101.3 수준으로 압구정로데오보다 높다.
상대적으로 낮아진 임대료 덕분에 상인들이 컴백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압구정로데오거리에 퓨전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A 씨는 5년 전 신사동 가로수길에 가게를 냈다가 2년 전 약 66m² 규모의 가게 월세가 1200만 원을 넘어가자 견디지 못하고 돌아왔다. 압구정로데오거리 상가 평균 임대료는 전용 66m² 1층 기준 보증금 7000만∼1억 원, 월세 400만∼450만 원 선이다. H공인중개사 대표 심모 씨는 “1층 중대형 점포의 경우 6개월 전만 해도 ‘무권리’(권리금 없음)가 당연했는데 손님이 늘고 장사가 잘되니 지금은 권리금이 평균 2000만∼3000만 원 이상은 붙어 있다”고 말했다.
압구정로데오거리는 높은 임대료 때문에 10여 년 전부터 신사동 가로수길 등 신흥 상권들에 ‘뜨는 동네’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8년간 지속된 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 공사와 패션몰의 온라인화도 상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장기 불황에 위기감을 느낀 일부 건물주들은 상권 쇠락의 요인을 높은 임대료로 보고 임대료를 낮추는 노력을 했다. 건물주와 상인, 지역관계자들이 모여 2017년부터 압구정 로데오 상권 활성화 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자구책을 마련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건물주와 상인들의 이 같은 상생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상혁 상가정보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그동안은 상가 소유자들의 건물 매매가나 임대료를 낮추는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됐지만 지금처럼 자영업자들의 상황이 어느 때보다 좋지 않은 시기엔 임차 수요를 꾸준히 유치하려는 작업이 중요하다”며 “침체하는 다른 상권(가로수길, 경리단길, 삼청동 등)들도 압구정로데오 상권의 자발적 변화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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