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자업계는 2004년 큰 충격에 부딪혔다. 유럽연합(EU)이 2006년 7월부터 전기·전자제품에 대한 유해물질 사용제한 지침(RoHS)을 발효하고 납과 카드뮴, 수은 등 6대 규제물질이 함유된 전자제품의 유럽 내 판매를 원천 금지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제품 생산 공정에서 발생하는 토양이나 수질 오염에 대한 규제는 있었지만, 제품 속 유해물질을 직접 규제하기로 한 건 RoHS가 처음이었다.
이때부터였다. ‘환경은 더 이상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걸 한국 전자업계가 인지한 것은. 삼성전자는 2005년 국내 기업 최초로 자체 유해물질 분석기관인 ‘환경분석랩’을 만들었고 환경 이슈가 생존의 문제로 급부상한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랩의 초창기 멤버인 김민관 제품환경팀 프로는 “처음 랩이 꾸려질 때만 해도 국내 어디에도 제품 내 유해물질 분석 방법을 아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 관련 표준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당시 랩에 모여든 40여 명의 연구원은 막막한 심정으로 ‘세상에 없던 규제’에 대응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지난달 28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R4’ 연구동 내 전용면적 약 991m²(약 300평 규모)의 환경분석랩을 찾았다. 에어컨이 통째로 들어가는 대형 실험실(체임버)부터 금속부품 속 원소를 X선으로 촬영하는 정밀분석 기계까지, 대당 아파트 한 채 값이 훌쩍 넘어가는 고가의 기계들이 즐비했다.
삼성전자가 내놓는 거의 모든 제품이 이 환경분석랩을 거쳐 세상에 나온다. TV나 노트북, 스마트폰 등 작은 부품 수십 개가 들어가는 제품들은 일일이 분해해 부품별로 원소 단위로 분석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 뒤에야 양산에 들어갈 수 있다. 에어컨과 공기청정기처럼 바람을 이용하는 제품은 체임버에 통째로 넣어 오존 같은 규제물질을 배출하지 않는지, 혹은 규제 물질은 아니지만 불쾌한 냄새를 발생시키진 않는지 등을 확인한다.
백영근 제품환경팀 프로는 “아직 개발 단계인 제품은 물론이고 이미 완성돼 시장에 출시된 제품도 주기적으로 검사해 혹시 모를 유해물질 발생 가능성을 체크한다”며 “이 때문에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매년 3, 4월 직전이 가장 바쁘다”고 했다. 이날도 TV와 비데, 에어컨 등 각종 제품들이 환경제품랩의 최종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럽에서 시작된 전자제품에 대한 환경규제는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았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제 환경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제품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조건 투자하고 해결해야 할 필수 조건”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환경분석랩은 규제에 사후 대응하기보다 앞으로 규제가 예상되는 물질을 미리 찾아내 선제 대응하는 곳으로 변신하고 있다. 최화주 제품환경팀 프로는 “우리의 목표는 규제보다 먼저 움직이는 것”이라며 “우리 스스로 ‘금지예상물질’을 지정해 아직까지 국제적으로 사용이 제한되진 않았더라도 자체적으로 사용량을 줄여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노력은 실제 제품에 반영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갤럭시S10’ 출시를 앞두고 지난해 10월 무선사업부 내에 친환경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세계적으로 불거진 ‘플라스틱 아웃’ 움직임에 발맞춰 스마트폰의 포장 케이스를 대폭 줄이기 위한 시도였다.
‘갤럭시S9’ 등 전작들과 달리 갤럭시S10은 번들 이어폰과 케이블선을 감싸던 플라스틱을 모두 친환경 종이 포장으로 대체했다. 허영채 프로는 “플라스틱보다 종이 단가가 더 비싸기 때문에 종이 사용량을 줄일 수 있도록 박스 구조도 최대한 단순화했다”며 “갤럭시S10뿐 아니라 갤럭시 폴드와 스마트워치 등 모든 제품에 같은 방식의 ‘포장 다운사이징’이 적용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올해부터 스마트폰 외에도 TV와 냉장고, 세탁기 등 생활가전 제품의 비닐 포장재에도 재생 소재 및 바이오 소재 등 친환경 소재를 단계적으로 적용할 예정이다. 전경빈 삼성전자 전무(글로벌CS센터장)는 “내년까지 종이도 친환경 인증 중 하나인 지속가능산림 인증을 취득한 종이 원료만 사용한다는 목표”라며 “제품에 의한 환경오염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원 사용 단계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을 낮추고 폐제품을 적극 회수하는 등의 자원순환 중기 목표를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낡은 스마트폰, 스마트 어항-IoT 밥그릇으로 ▼
길게는 10년 넘게도 쓰는 냉장고나 세탁기 등 대형 가전제품과 달리 스마트폰은 대다수 사용자가 2년 안팎 주기로 바꾼다. 이 때문에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쌓이는 ‘스마트폰 쓰레기’의 양은 어마어마하게 늘고 있다.
2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버려진 폐전자제품은 5000만 t에 이르는데 이 중 약 82%(약 4100만 t)가 스마트폰과 컴퓨터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폐휴대전화는 그냥 버릴 경우 환경에 재앙이 되기 때문에 잘 버리는 것도 일이다. 소각할 경우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될뿐더러 제품 속에 들어있는 재활용이 가능한 금속과 플라스틱, 유리 등 값진 자원이 그대로 버려진다.
매년 수천만 대의 스마트폰을 세계 시장에서 판매하는 삼성전자가 ‘생산자 책임 원칙’에 따라 ‘갤럭시 업사이클링(upcycling)’ 프로그램을 내놓은 이유다. 업사이클링은 버려야 할 물건을 단순히 재사용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과 달리 물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수명 자체를 연장시키는 솔루션이다.
삼성전자가 사내 스타트업 문화를 육성하기 위해 마련한 ‘C랩’ 소속 ‘갤럭시 업사이클링’팀은 중고 갤럭시 스마트폰 속 각종 센서와 디스플레이 등을 활용해 완전히 다른 용도의 사물인터넷(IoT) 기기로 재탄생시키는 방안을 제안해 지난해 미국 환경보호국으로부터 ‘신기술상(Cutting Edge Award)’을 받았다.
예를 들어 집을 장기간 비우더라도 챗봇으로 물고기 상태를 관찰하거나 먹이를 줄 수 있는 원격 어항관리 프로그램인 ‘스마트 어항’에 버려진 ‘갤럭시S3’의 디스플레이 등을 재활용하는 식이다. 또 전면 디스플레이가 산산조각 나버린 구형 갤럭시 스마트폰은 애완동물용 IoT 밥그릇으로 재탄생했다. 식기에 부착한 센서들이 반려동물의 식사 여부를 체크해 주인의 스마트폰 알람으로 알려준다.
삼성전자 측은 “폐기되는 스마트폰의 소각을 막는다면 앞으로 5년간 약 140만 t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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