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인생무상’과 함께 ‘화병’을 적은 카카오톡(카톡)이 많이 날아왔다. 오욕과 회한으로 점철되지 않은 삶이야 없겠지만 그의 부고를 접하면서 새삼 떠오른 것은 권력과 재벌의 관계다. 그가 토사구팽을 떠올리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로켓맨’이 던진 신의 한 수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안보 상황은 정말 험악했다.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 직후 “수소탄 성공”을 주장한 북한은 그해 9월 9일 5차 핵실험에 이어 2017년 9월 3일에는 100kt의 위력을 보인 6차 핵실험을 했다. 100kt은 수소탄을 터뜨릴 때 나올 수 있는 힘인지라, 한미 정보당국은 ‘북한이 전략핵을 터뜨린 것 같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문재인 정부가 2017년 5월 10일 출범했는데, 북한은 기다렸다는 듯 미사일을 잇달아 쏘아 올렸다. 5월 14일 화성-12형, 5월 21일 북극성-2형, 5월 27일 KN-06(추정), 5월 29일 스커드(추정), 7월 4일 화성-14형, 7월 28일 화성-14형, 8월 26일 단거리, 11월 19일 화성-15형을 발사한 것. 이 중 화성-15형은 미국 본토를 가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은 괌과 오키나와를 공격할 수 있는 중거리탄도미사일(IRBM)로 판단됐다.
때마침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유엔해양법협약을 무시하고 작전을 거듭하자, 미국은 7함대보다 4배 이상 전력이 강한 3함대를 동해와 동중국해, 남중국해로 증파해놓고 있었다. 한반도 주변의 긴장이 한껏 고조된 것이다.
빈센트 브룩스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은 미국 PBC와 인터뷰에서 “(그때) 북한과의 전쟁에 얼마나 가까웠는가”라는 질문에 “가까웠다. 모든 미군 병력과 전투 지휘부가 집중됐다”고 답했다. 그는 또 “미국이 고려했던 시나리오 중에는 선제공격이 포함됐는가”라는 물음에 “모든 것이 계획됐다. 내가 모시는 (한미) 두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대비를 확실히 했다. 두 대통령 중 한 명의 일방적인 결정인 경우도 포함했다”고 말했다.
한미연합사령부는 문재인 대통령이 반대하면 가동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도태평양사령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명령만으로 바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브룩스는 한미연합사보다 전력이 훨씬 강한 인도태평양사도 준비태세를 갖췄다고 밝힌 것이다.
임원들의 반대 불구 유치위원장 맡아
그때 ‘로켓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신의 한 수’를 던졌다. 2018년 신년사에서 평창(동계)올림픽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 문재인 정부가 적극 화답하자, 김 위원장은 여동생 김여정을 앞세워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을 강원 평창으로 보내 이목을 잡아끌었다. 이후 일사천리로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6·10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9·18 평양 남북정상회담, 2019년 2·27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잇달아 가졌다. 문재인 정부가 바라던 유화국면이 펼쳐진 것인데, 이를 만든 고속도로는 분명 평창동계올림픽이었다.
한국은 3수 끝에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했다. 그때 유치위원장을 고(故) 조양호 회장이 맡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을 지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비교된다. 조 회장의 부친인 고 조중훈 회장도 정주영 회장과 함께 서울올림픽 유치에 깊이 관여했다.
월드컵은 국가가 개최자지만, 올림픽은 자치단체가 주최자다. 1차 유치전 때 당시 노무현 정부는 나서지 않았다. 강원도는 1차 투표에서 1등을 하고도 결선 투표에서 역전패했다. 2차 유치전이 임박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힘을 보태고자 유치전이 벌어진 과테말라로 날아갔다. 하지만 경쟁자인 러시아에서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왔다. 그리고 1차 유치전보다 못한 패배를 당했다. 평창동계올림픽 3차 유치전에 나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방 공무원 조직으로는 올림픽 유치가 어렵다 보고 기업인을 물색했다. 최태원 SK 회장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놓고 저울질하다 조 회장을 선택했다. 이것이 알려지자 대한항공 임원들은 일제히 “평창동계올림픽은 적자가 예상된다. 서울(하계)올림픽을 유치한 정 회장도 나중에 팽 당했다”며 결사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요청이 오자 조 회장은 수락했다. 그때 실무를 맡았던 함영준 전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은 “조 회장은 선대 회장을 의식해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이후 유치위원회 활동은 활발해져 2011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유치위원회는 조직위원회로 전환됐는데, 조직위원장은 조 회장에 앞서 유치위원회를 이끌던 김진선 전 강원도지사가 맡았다. 이명박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받은 조 회장은 고문을 맡았다. 김 위원장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해서 올림픽조직위원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강원도 힘만으로는 올림픽 준비에 힘이 달렸기에 2014년 당시 박 대통령은 조 회장에게 조직위원회를 맡기고자 했다. 조 회장을 아는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마음이 여린 이’로 기억한다. 거절을 못 하는 조 회장은 임원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며 또 받아들였다.
그때 한진해운 사건이 터졌다. 한진해운은 그의 동생인 고 조수호 회장이 이끌던 세계적인 해운사였다. 조수호 회장 타계 후 부인인 최은영 회장이 이끌었는데 해운 경기 쇠락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최 회장은 큰 시아주버니인 조 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2014년 말 한진해운을 인수한 조 회장은 2년간 2조 원을 투입해 정상화를 시도했으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판단한 KDB산업은행이 마지막 2000여억 원 지원을 거절함으로써 끝내 파산했다. 그해 12월에는 땅콩회항사건에도 직면하게 되었다. 두 사건으로 시달리던 그는 2016년 5월 갑자기 조직위원장에서 물러났다. 이 일에 대해 함구하던 그는 2017년 국회 최순실 국정조사에 출석해 “김종덕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 사퇴 압력이 아닌 사퇴 통보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조직위원장 해임 통보한 숨은 손
박근혜 정부 시절 많은 세력이 평창동계올림픽을 노렸는데, 최순실도 그중 한 명이었다. 최씨는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장 공사를 유럽의 한 기업에 맡기고자 했지만, 조 회장이 이끄는 조직위원회가 실사 후 불가를 통보했다. 대한항공 측은 이 일이 있은 후 조직위원장 해임 통보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6년 10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졌고, 이후 12월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됐으며,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으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후 치러진 대선을 통해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이후에도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을 계속해 평창동계올림픽 개최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외신이 이어졌다. 그러나 2018년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를 계기로 평창동계올림픽은 성공적으로 치러졌고, 한반도는 유화국면에 들어서는 반전이 일어났다. 올림픽은 반전을 이뤘지만, 조 회장은 반전의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지난해 4월 둘째딸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사건이 불거지면서 사면초가에 놓였다. 그의 아들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은 인하대에 부정입학한 사실이 드러나 졸업이 취소되기도 했다. 그리고 수사기관인 검찰과 경찰은 물론 관세청,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으로부터 전방위 조사를 받았다. 다행인 것은 그 와중에도 대한항공이 흑자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조 회장의 경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이 정주영 회장의 사례다. 정 회장은 세계적인 조선소 경영이 목표였기에 잠수함 사업을 하려 했다. 그런데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잠수함 사업권을 대우 측에 줬다(1987). 정의승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이사장은 “그 일로 정 회장은 정말 대로했다. 청와대에 다녀온 뒤 바로 현대그룹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SLOOC(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집행위원 등 모든 자리를 사퇴했다”고 말했다.
백석꾼의 고민과 만석꾼의 숙제
정 회장은 노태우 정부 때인 1988년 5공 청문회에 출석해 팽을 당한 분노를 토로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개인사를 소재로 한 소설 ‘돈황제’가 출간되는 위기를 맞았다(1989). 이 때문에 정치를 결심하고 통일국민당을 만들어 1992년 대선에 출마했다. 민주자유당 김영삼(YS) 후보가 여권 표가 분산된다며 강하게 만류했으나 그는 사퇴하지 않았다. 대선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내 현대를 압박했다. 이 일을 기억하는 이한동 전 총리는 “YS 시절 현대는 정부 자금을 단 한 푼도 받아 쓰지 못했다. 그런데도 조선 경기 호황 등으로 현대는 성장을 거듭했다. 운 좋은 사람은 누구도 못 막는다”고 말했다. 정치를 접은 정 회장은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 그리고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펼치자 소떼 방북을 실현하고 금강산관광을 실시하는 등 대북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김대중 정부가 끝나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현대는 대북송금 사건 등으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후 현대는 정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현대그룹의 맏형인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정치와의 접촉을 극도로 회피하는 삶을 살았다.
대한항공 임원들이 조 회장을 만류한 것은 현대의 부침에 대한 이 같은 기억 때문이다. 정 회장과 현대는 뒷심이 있어 십수 년을 버텨냈지만, 대한항공은 어렵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정치에 접근하지도 않았던 조 회장은 온가족이 연루된 위기를 맞고 타계까지 했다. 대한항공의 한 임원은 “그분에 대해 세상에서는 어눌하다고 한다. 그분이 모질었다면 평창의 성공이 쉽지 않았을 테고,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를 개선할 계기를 좀처럼 잡지 못했을 것이다. 훈장 받으면 한 번은 봐준다는 속설이 있던데, 국민훈장 무궁화장도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재벌 회장은 재벌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오욕이 있다. 이를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부장은 “백석꾼은 백 가지 고민이 있고 만석꾼은 만 가지 숙제가 있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조 회장의 타계는 문재인 정부에게 재벌과 경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숙제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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