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1시. 인천 부평구에 위치한 ‘러블리페이퍼’ 사무실엔 폐박스가 가득했다. 4명의 젊은이들이 폐박스를 일정한 크기로 잘랐다. 여러 장 겹친 후 그 위에 광목천을 덧댔다. 코팅 역할을 해주는 제소를 바르자 누런색의 폐박스가 새하얀 캔버스로 변신했다.
“이 캔버스를 작가들에게 보냅니다. 그러면 작가들이 그림을 그려 다시 저희에게 보내요.”
박스를 자르던 김인용 씨(25)가 얼굴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는 올 초부터 이곳에서 캔버스를 만들고 있다. 2016년 문을 연 ‘러블리페이퍼’는 폐지를 줍는 저소득층 노인을 돕는 사회적 기업이다. 저소득층 노인에게서 일반 폐지보다 20배 비싼 가격으로 폐박스를 사들인 후 캔버스를 만들고 그 위에 재능기부 작가들의 그림을 그려서 판매한다. 그 수익으로 저소득층 노인을 돕는다. 김 씨는 “다양 한 일과 직업이 있겠지만 혼자서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잘살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 “나와 공동체의 성공, 함께 이뤄져야”
취재팀이 3, 4월 기성세대와 달라진 청년들의 ‘성공 법칙’을 알아보기 위해 심층 인터뷰한 20, 30대 중 상당수는 자신의 성공이 지역사회나 공동체와 함께 이뤄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들은 성공의 기준을 경쟁과 승리, 재산, 명성, 명예 등의 키워드로 설명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공존이나 공생, 배려, 공정, 환경 등과 같은 사회적 가치를 중요한 성공 기준으로 삼았다.
3년간 다니던 대기업을 퇴직한 후 2017년 전남 목포로 향한 박명호 공장공장 대표(32)가 그런 사례다. 박 대표는 현재 목포시 중앙동에서 ‘괜찮아 마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목포 시내 빈집과 여관 터를 개조한 후 청년들에게 생활공간을 제공하는 일이다. 현재까지 60여 명의 청년이 이곳에서 거주하며 지역사회에 도움이 될 사업 아이템을 구상했다.
이곳을 거친 청년들은 목포 내 각종 공방이나 식당을 여는 등 동네를 발전시킬 각종 사업체를 설립하고 있다. 박 대표는 “주변 사람들과 공생하고, 함께 성공하는 법을 알고 싶어 하는 청년들이 많다”며 “이런 청년들을 위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청년드림센터가 취업정보 사이트 진학사 캐치와 함께 청년 452명에게 ‘성공을 이루는 과정에서 이웃, 지역사회, 공동체의 이익을 함께 추구해야 하는가’라고 물은 결과 63.1%가 ‘그렇다’고 답했다. ○ “공정해야 성공도 의미가 있어”
이런 청년들의 태도에 기성세대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50대 직장인 최모 씨는 “90년대생들은 자기중심적이다 못해 이기적인 줄 알았다”며 “하지만 겪어보면 의외로 공익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청년세대의 이런 흐름은 빈곤에 대한 경험이 없는 그들의 성장 배경에서 싹이 텄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요즘 청년들은 기본적인 의식주가 갖춰진 환경에서 자랐다”며 “그러다 보니 가난했던 경험을 토대로 물질적 가치를 성공 기준으로 삼았던 기성세대와 달리 탈물질적 가치에 삶의 무게를 둔다”고 말했다.
특히 ‘공정’을 추구하는 청년들이 많다. 명문대 출신인 고귀현 씨(32)는 6년 전 남미 배낭여행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길에서 수공예품을 파는 가난한 어린이와 여성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이들을 도울 수 있는 활동을 고민한 끝에 남미 여성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국내에 납품하는 사회적 기업 ‘크래프트링크’를 설립했다. 그는 “현지보다 두 배 정도 더 비싼 가격에 수공예품을 사들여 현지 여성들의 소득 수준을 높여준다”고 전했다.
변호사 서국화 씨(34)는 동물권 연구 변호사단체 ‘PNR’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내 일도 바쁘지만, 동물을 위한 법률 개선에 목소리를 내는 단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직접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성공을 공동체의 성장과 연결시키려는 청년들의 움직임을 긍정적인 사회적 에너지로 활용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조영복 부산대 경영대 교수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보다 쉽게 사회적 문제를 인지하고 또 해결에 나설 수 있게 되면서 ‘나보다는 우리’를 외치는 청년이 늘어났다”며 “기성세대는 이런 청년들이 힘을 모을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되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 “내 삶의 주인은 나” “행복한 일 하는게 성공” ▼
달라진 청년들의 말말말
“더 이상 삶의 기준을 타인에게 맞추지 않을 겁니다. 내게 중요한 가치를 지키며 살 거예요.”
대기업 8년 차인 정혜은(가명) 씨는 동아일보 창간기획 ‘“부장님처럼 살기 싫어요” 청년들의 신(新)성공법칙’ 특별취재팀 대나무숲에 e메일을 보내 이전과 달라진 다짐을 밝혔다.
정 씨는 “기사를 보며 기성세대의 기준대로 살고 싶지 않은 청년들이 많다는 것에 깊이 공감했다”면서 “나 역시 안정성과 높은 연봉이라는 기준에 맞춰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삶의 목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현재 퇴사학교에서 삶의 목적과 방향을 고민하는 수업을 듣고 있다. 그는 “작더라도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지키며 살 수 있는 회사에서 일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 5회 시리즈 연재를 위해 만난 청년들은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공통된 시각을 갖고 있었다. 기성세대의 필승 성공법칙이던 명문대 졸업, 대기업 입사, 전문직 취업은 더 이상 청년들에게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기성세대를 이해하면서도 나만의 성공 기준을 찾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2회 ‘부모가 정해놓은 성공 공식을 거부하다’ 편에 소개된 ‘딸기 농부’ 이하영 씨(21)는 기성세대 성공의 척도인 ‘엄친아·엄친딸’에 대한 생각을 묻자 “농업계 엄친딸이 되면 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남자 유치원 교사 김건형 씨(32)는 “기성세대의 생각은 이해하지만 내가 행복한 일을 하는 게 성공”이라고 말했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신만의 성공 기준을 세우고 행복을 찾는 청년의 모습은 이제 하나의 문화가 됐다”면서 “기성세대가 이들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함께 고민할 때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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