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류 플랫폼 스타트업 이스트엔드의 김동진 대표는 한 달에 나흘은 중국 광저우(廣州)를 찾는다. 김 대표가 동대문을 떠나 광저우를 찾게 된 것은 단순히 판매 원가 절감 때문만은 아니다.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인건비 부담이 커진 영향도 있지만 중국 사업 환경이 여러모로 낫기 때문이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가 원활히 이뤄지다 보니 그 분위기에 한껏 고무된 중국인 디자이너들이 한 달에 20개가량의 신규 아이템을 만들어 내놓기 때문이다. 또 김 대표의 네트워크에 의존해 미국 시장으로 수출하려는 중국 파트너가 많아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도 가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 대표는 “동대문 도매상조차 광저우를 찾으면서 동대문 시장의 원단과 옷이 중국산으로 뒤덮이고 있다”면서 “이미 동대문 옷의 50%는 ‘메이드 인 차이나’여서 과거 K패션을 상징하는 동대문 패션의 독창성이 사라져 중국인들이 동대문에서 옷을 살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동대문 패션 클러스터는 중국 패션산업의 성장, 온라인 쇼핑몰 증가, 인건비 상승 등으로 빠르게 붕괴하고 있다. 패션 업계는 4년 전만 해도 30조 원에 달했던 동대문 클러스터 매출이 최근 15조 원으로 절반가량 떨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동대문은 한국 섬유패션산업 매출의 17%, 수출의 21%, 고용의 26%를 차지한다.
온라인 쇼핑몰들이 ‘초저가’ 경쟁을 벌이면서 중국산에 대한 수요가 많아져 동대문 시장의 쇠퇴는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10년 전 인터넷에서 평균 3만 원 선에 판매되던 옷의 가격은 오히려 2만 원 이하로 떨어졌다는 게 온라인 쇼핑몰 사업자들의 말이다. 서울 건대입구역에서 의류 소매업을 하는 최모 씨는 “원단이나 바느질 수준을 보기보다 더 싸고 당장 예뻐 보이는 것만 찾는 소비자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동대문에서 원부자재 도매업을 하는 윤모 씨는 “판매자들이 옷 가격을 낮추기 위해 원부자재와 봉제 등 가장 밑단의 원가를 줄이려 한다”면서 “서로의 살을 깎아 먹는 치킨게임이 이어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온라인 쇼핑몰 업체들이 중국 생산업체들과 직접 거래하면서 동대문에서 주문하는 도매 물량이 줄어드는 ‘동대문 패스’가 이어지고 있다. 도매상가 전문 중개업소의 신모 대표는 “도소매 복합쇼핑몰인 맥스타일은 지상 1∼5층 점포 수가 150여 개인데, 이 중 80%가량은 공실”이라고 전했다. 동대문에서 30년째 도매 사업을 하고 있는 정모 대표는 “과거엔 지방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와 옷을 대량으로 떼어 갔는데 이제는 온라인에서 몇 개씩만 주문하는 수준”이라며 “비교적 장사가 잘되는 청평화시장도 2년 전에 비해 매출이 50% 이상 줄었다”고 말했다.
동대문과 달리 광저우는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세계적인 패션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광저우 시정부는 ‘디자인 산업의 발전과 국제디자인도시, 패션도시 건설’을 내세우며 광저우 패션위크를 세계화하고 광저우 패션산업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의 원단 생산 기술과 디자인 수준이 일부 분야에서는 동대문을 넘어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5년 전만 해도 중국산 옷은 ‘중국 내수용’이란 평가가 많았지만 이제 한국을 비롯해 미주 유럽 소재 사업자들도 수입해 갈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3월 한국의 대중국 섬유 수출 규모는 3억8100만 달러(약 4523억 원)인 데 비해 수입 규모는 14억5600만 달러(약 1조7333억 원)에 달한다. 지난해 수출은 19억16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2.6% 줄었고, 수입은 66억18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7.1% 증가했다.
국내로 중국산 원단을 수입하는 A업체 대표는 “동대문에 풀리는 원단의 절반 이상은 중국에서 배에 컨테이너 박스째로 들여온다”면서 “국내에 풀리는 중국 원단 규모가 조 단위”라고 전했다. 서울 중구 전통시장과 관계자는 “원산지 표시를 바꿔 중국산을 한국산으로 속여 파는 ‘라벨 갈이’가 성행하고 있다”면서 “올해도 현장 적발이 이뤄져 피의자 10여 명을 입건한 상태”라고 말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동대문 시장의 붕괴가 단순히 경기 변화나 관광객 감소 등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인 만큼 동대문 시장 상인과 신진 디자이너, 정부가 힘을 합쳐 패션 산업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부원장은 “동대문은 디자인과 제조, 판매를 한 지역에서 빠르게 할 수 있는 곳으로, 동대문이 무너지면 한국에서 ‘패스트 패션’을 하기도 어려워질 뿐 아니라 이를 발전시켜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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