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혈’ 채용으로 일자리 늘리기…정부 순응해야 좋은 점수
“낙제생, 행실 바르다고 높은 점수 주나” 전문가들 비판
한해 5조원 규모의 영업이익을 내던 한국전력공사가 2018년 6년만에 처음 적자로 돌아섰음에도 경영실적 평가는 ‘양호(b)’ 등급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전면 개편된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체계에 따른 것이다.
수익이나 재무 같이 누구도 바꿀 수 없은 평가 지표는 비중이 줄었다. 친환경, 사회적 기여 등 정부 정책을 잘 따랐는지 ‘태도’를 따지는 평가가 중요해지면서 나타난 기현상이다.
높은 평가를 받으면 직원들에게 성과급이 지급되는데 적자기업이 돈자치를 하는 웃지못할 상황도 연출될 것으로 보인다.
24일 기획재정부의 2017~2018년도 ‘공공기관 경영평가 편람’에 따르면 공기업의 평가지표는 크게 Δ경영 관리 Δ주요 사업으로 구성된다.
경영관리 성적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는 영업이익과 부채다. 한전은 이 부분 실적이 크게 악화됐다. 그러나 재무예산관리 점수가 2017년 10점에서 지난해 5점으로 축소됐다. 총 3점인 부채감축달성도·중장기 재무관리계획은 항목에서 사라졌다.
대신에 수치화 하기 어려운 ‘사회적 가치 구현’의 배점이 22점 추가됐다. 기업의 수익과 재무상태가 모두 0점을 받아도 신규채용을 늘려 사회적 가치 구현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면 만회할 수 있다.
주요사업 항목의 평가에서도 발전사의 핵심 역량은 배점이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2017년 한전의 주요사업 항목에는 전력수급사업이 10점, 송변전사업이 12점, 배전사업 20점, 미래성장사업이 8점이었다. 그러나 2018년엔 각 5점, 7점, 10점, 5점으로 줄었다.
대신에 ‘성과관리의 적정성’이라는 새로운 항목을 만들어 12점을 배정했다. 이것은 평가자의 주관적 판단으로 이뤄지는 ‘비계량 지표’다. 예를 들어 배전사업을 엉망으로 해서 10점 만점에 5점밖에 받지 못하더라도 평가자가 ‘그래도 사회적 가치를 위해 노력했다’며 12점 만점에 10점을 주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공공기관 평가위원회 관계자는 이 항목에 대해 “주요사업이 사회적 가치에 어떻게 기여했느냐를 평가하는 것”이라며 “예컨대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하면서 한전 뿐 아니라 주변 중소기업과 경쟁력을 나눠서 동반상승한다든지 그로 인해 일자리창출에 기여한다든지 했다면 그 부분을 보고 좋은 평가를 주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요사업’ 부문에도 일자리 창출 노력으로 득점할 수 있는 항목이 마련된 셈이다.
모호한 내용의 비계량 지표가 추가됨에 따라 결국 정부의 입맛대로 평가하겠다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평가단 관계자에 따르면 신설된 이 항목들은 검증된 해외 선례를 참고한 것도 아니었다.
이 같은 지표 구성에 대해 전문가들은 우려를 나타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배보다 배꼽이 훨씬 큰 상황”이라며 “그 두가지 지표가 주요사업 평가 전체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점수”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 개편이 공기업에 줄 메세지는 뻔하다. 경영을 제대로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 둘만 잘 하면 다른 건 바닥으로 해도 훨씬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라며 “한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앞으로 전력 수급을 위해 노력하겠나 아니면 성과관리 적정성 같은 지표를 맞추기 위해서 열심히 하겠나. 전력 수급 관리는 훨씬 어려운데 배점도 낮아서 아무도 안하려고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도 “(성과관리·지표구성이라는 비계량 지표가) 내용은 애매모호하면서도 엄청나게 큰 점수를 차지한다”며 “꼬리가 몸통을 흔들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비계량 지표가 2018년 개편안에서 계량지표를 넘어선 것도 지적되고 있다. 비계량 지표는 평가자의 주관에 의해 결정되고 계량지표는 객관적 수치 계산으로 구해진다.
2017년 지표에서 계량 대 비계량의 비율은 55 대 45로 계량이 우세했다. 그러나 2018년 개편안에서는 48 대 52로 비계량 지표가 더 커졌다. ‘사회적 가치 구현’과 ‘주요사업 지표구성의 적정성’ 등 비계량 위주의 평가항목이 대거 반영된 탓이다.
홍 교수는 “주관적 평가 부분인 비계량을 크게 늘렸다면 그 평가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계량평가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부분이 굉장히 많다. 하지만 60 대 40 정도를 넘지 않는 게 좋고 과거에도 그렇게 해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객관식 점수가 50점인 아이가 ‘품행이 바르고 선생님 말을 잘들었다’는 비계량 평가에 따라서 시험을 1등한 아이를 제치고 장학금을 받는다면 누가 공정한 평가라고 수긍하겠나”라며 “적자 전환한 한국전력공사가 양호 등급을 맞은 것처럼 상식과 반하는 결과가 나타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꼬집었다.
모호한 내용의 비계량 평가가 늘어난 것은 결국 정부가 입맛대로 점수를 주겠다는 것이며 평가 압박을 받는 공공기관도 이를 내심 원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김 교수는 “이전까지 정부가 하라는대로 움직였더니 실적이 안좋았던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도 실적이 나쁘다고 낮은 점수를 줄 거냐는 (공기업측의) 불만이 있었기에 이렇게 바뀐 측면이 있다”며 “(정부 지시와 기관 평가의) 괴리를 조금 없애주는 것으로 정부가 원하는 정책을 잘 수행하면 점수를 잘 주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이어 “(민간기업처럼) 사업성으로만 평가하면 공기업은 사업만 잘하면 된다. 그런데 (정부가) 다른 일을 시키려다보니 비계량지표가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자리창출·환경’ 등 정부가 추진해오던 정책 내용을 고스란히 평가기준으로 끼워넣는 것이 평가체계 자체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홍 교수는 “역대 정부에서도 정부가 강조하는 정책방향을 공공기관 평가에 반영하기는 했다”면서도 “그런건 가산점을 주는 형태였지 22점짜리나 되는 평가기준을 신설하는 식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7년 평가기준에도 기관의 일자리 정책을 평가하는 항목이 있었으나 다른 항목들과 별개의 10점짜리 가산점으로 적용됐다.
또 한전과 같은 적자기업이 전년과 같은 ‘양호’등급을 받으면서 수익구조 개선이 더뎌지는 데에는 ‘등급제’의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공기관 평가단 관계자는 “한전은 2017년에는 ‘우수(a)’ 커트라인에 가까운 ‘양호(b)’였지만 2018년은 ‘보통(c)’에 가까운 ‘양호’ 등급”이라며 “등급의 범위가 넓다”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에는 점수에 따라서 인센티브 비율이 나왔다. 그래서 0.1점이라도 올리려고 다 난리를 쳤다”며 “등급 안에서 너무 (경쟁)하지 말자는 말이 나와서 이제 점수가 아닌 등급으로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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