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적자 중 ‘고용 증대’ 가속…“기업 생리와 반대”
실적 좋은 기업은 채용 안늘려…“제도가 기업 지속성 저해”
“한국전력공사 같은 적자 기업들은 수익성이 안 좋다는 것을 미리 파악하고 일자리·리더십 등 다른 분야에서 평가점수를 메꾸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했다”
5조원 규모의 영업이익을 냈던 한전이 1년만에 수천억대 적자로 돌아섰음에도 경영평가는 똑같은 ‘양호(B)’ 등급을 유지한 데 대해 정부 산하의 공기업·준정부기관 평가단이 내놓은 설명이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개편된 공기업·준정부기관 평가체계가 공기업의 경영상황이 악화될수록 되레 고용 경직도를 높이는 구조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영업이익이 떨어져 수익성·재무건전성에서 감점이 될 수록 정규직 전환·공공일자리 증대를 통해 경영평가 점수를 만회하려는 동기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경영평가 점수를 잘 받아야 해당 기관은 높은 성과급을 받을 수 있다.
공공기관의 일자리 창출 등 사회적 기여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실적이 저조한 기관이 더 고용을 확대하도록 만드는 모순적인 평가 기준은 문제라는 지적이 이어진다. 이는 경영상황이 위기일 수록 인건비를 아끼는 일반적인 기업의 생리와 정 반대의 모습이다.
영업이익 대비 인건비 비율이 높아 공기업의 체질이 악화되면 결국 국민들에게 그 피해가 돌아가게 된다. 전기료 인상 압박도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전, 2천억 적자 나자 채용 22% 늘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알리오)과 전자공시시스템(DART)의 분기·반기·사업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전력공사는 2017년에서 2018년 사이 시장형 공기업 16개 중 가장 큰 영업이익 하락폭(5조1611억원)을 기록했다.
한전의 연간 영업이익은 2016년 12조15억원으로 고점을 찍은 뒤 2017년 4조9532억원으로 줄고 2018년에는 -2080억원의 적자로 전환됐다. 일반 기업에 있어서는 경영위기에 준하는 상황이다. 특히 2017년은 1분기(9000억원)부터 전년 동기(2조1628억원)보다 저조한 실적이 이어져 연간 이익 감소가 예견된 상황이었고 2018년부터 탈원전 정책으로 인한 생산비 급증이 겹쳤다.
그럼에도 한전은 2017년 말 정부의 공공일자리 확대 기조를 받아들여 정규직 채용·정규직 전환·단기일자리를 대폭 늘렸다. 2018년 적자전환한 해 정규직과 청년인턴을 포함해 고용인원을 22.2%나 늘렸다.
2016~2018년간 한전의 임원·정규직 신규채용 인원 수는 급감하는 영업이익과 정 반대로 각각 1413명, 1574명, 1786명으로 늘었다. 통계 부풀리기용 단기일자리로 논란이 됐던 체험형 청년인턴도 같은 기간 591명, 996명, 1354명으로 급증했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 계획은 영업이익 감소가 시작된 2017년 돌연 0명에서 234 으로 늘어 2018년에 전환이 집행됐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해당 직무에 대해서는 정규직 채용만 가능하게 됐다. 한전 관계자는 “육아휴직자를 잠시 대체해 근로하시는 분이나 프로젝트성 업무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2017년도 전환계획으로 전환 완료했다”며 “앞으로는 그 직무에 대해서는 정규직을 쓰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적자를 기록한 2018년에는 청소·시설관리 용역 등으로 구성된 ‘소속외 인력’ 2183명의 정규직 전환 계획이 수립됐다. 이전 4년간은 0명이었다. 한전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은 협의기구를 통해 한전 자회사·본사로의 정규직 전환이 논의되는 중이다.
경영위기 상황에서의 이같은 일자리 선심쓰기는 결국 매출에서 깎인 경영평가점수를 일자리 창출 등 다른 평가항목에서 메꾸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실제로 정부 산하 공기업·준정부기관 평가단은 20일 서울정부청사에서 ‘2018년도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 결과’를 발표하며 한전 등 적자기업이 높은 등급을 받은 데 대해 “그런 기업들은 수익성이 안 좋다는 것을 미리 캐치해 조직운영·리더십 전략 등 다른 부분에서 최대한 노력을 했다”고 설명했다.
기획재정부가 공시한 2017~2018년도 공공기관 경영평가편람에 따르면 개편된 2018년 평가지표에는 일자리 창출(7점) 등으로 구성된 ‘사회적 가치 구현’(22점) 항목이 신설됐다. 적자 등 영업손실이 직접 반영되는 지표는 노동·자본 생산성으로 구성된 업무효율(5점)과 재무안전성(2점)으로 그 합이 일자리 창출과 같다. 손실이 발생하고 적자가 생겨도 일자리 창출로 메꿀 수 있는 구조다.
◇실적 좋은 기업은 되레 채용 늘리지 않아 ‘모순’
공기업의 일자리 창출은 공적 기능이라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도 있지만 실적 여유가 있는 공기업은 일자리 창출에 시큰둥한 반면 유독 경영위기에 몰린 공기업이 인건비 지출에 목 메 수익을 더 악화시키는 구조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2017~2018년도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의 시장형 공기업 절대평가를 비교해보면 실적이 비교적 괜찮은 기업보다 실적이 나쁜 공기업이 더 강하게 일자리 확대를 추진한 경향이 보인다.
한전과 마찬가지로 두 해 모두 종합 ‘양호(b)’를 받은 인천항만공사는 연간 영업이익이 각각 350억원, 281억원이다. 2018년 경기 악화로 거의 모든 시장형 공기업에서 영업이익 감소가 나타난 것을 비춰볼 때 영업이익 감소는 크지 않은 수준이다.
같은 기간 인천항만공사의 임원·정규직 신규채용 인원은 각각 29명과 14명, 체험형 청년인턴은 7명과 12명, 계약직의 정규직 전환계획은 2년 모두 0명이다. 이익실적에서 감점이 크지 않은 만큼 ‘양호’ 점수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채용을 늘린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부산항만공사도 2017년~2018년 동안 영업이익은 각각 1425억원, 1307억원으로 크지 않은 감소를 보였고 종합 점수는 ‘보통(c)’에서 ‘양호(b)’로 올랐다.
같은 기간 임원·정규직 신규 채용은 27명과 20명, 체험형 인턴은 5명과 10명, 정규직 전환 계획은 1명과 0명이다. 한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정이 여유로웠음에도 고용 증대에 애쓴 흔적은 덜하다.
반면 영업이익 감소폭이 큰 기관은 대부분 정부의 일자리증대 기조를 적극 반영한 모습이었다.
한국지역난방공사는 2017년~2018년 사이 영업이익이 1198억원에서 145원으로 크게 떨어졌지만 임원·정규직 신규채용을 103명에서 222명으로 늘렸다. 같은 기간 소속외 인력 전환계획은 26명에서 274명으로 크게 늘렸다.
한국수력원자력은 2017년~2018년 사이 영업이익이 1조3972원에서 1조1456원으로 떨어졌지만 당기순이익은 8618억원에서 -1020억원으로 급락해 재무구조가 악화했다. 같은 기간 체험형 청년인턴은 149명에서 535명으로 대폭 늘렸다.
한국동서발전㈜은 2017년~2018년 사이 영업이익이 4226억원에서 586억원으로 크게 떨어졌지만 같은 기간 임원·정규직 신규채용을 98명에서 147명으로 늘리고 소속외 인력의 정규직 전환계획을 0명에서 421명으로 늘렸다. 체험형 청년인턴은 2016년 106명이었지만 이후 2년간 140명, 150명을 고용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새로 개편된 평가체계가 공기업들의 모순적인 행태를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공기업은 기본적으로 민간기업과 달리 이윤보다 공공의 목적을 달성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에 동의한다”면서도 “그런 면에서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게 맞다손 치더라도 여유가 있는 기업이 일자리를 늘리고 여유가 없는 기업은 인건비 지출을 자제하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공기관이 사회적 가치와 일자리 창출에 힘을 쏟을 수 있지만 공기업은 얘기가 다르다”며 “공기업은 기업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이익 창출이 상당히 중요하지만 ‘사회적 가치’ 같은 지표가 너무 커져서 기업이 이익 창출과 반대로 움직이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기관 내에서 자체평가보고서를 내보면 그 해에 좋은 평가를 받을지 아닐지 다 안다. 안되겠다 싶으면 다른 쪽을 더 만회하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이를 위해 불필요한 고용을 늘린다다든가 하면 경영평가의 근본적 목적과는 반대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공기업도 기본적으로 기업이기 때문에 기업의 기본적 부분인 효율성·재무건전성을 지켜야 한다”며 “공기업의 사회적 가치에 동의하지만 재무적 성과를 기본으로 깔고 나서 사회적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 지금은 재무적 성과가 안 나올 것 같으면 다른 부분으로 점수를 메꾸게 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부실경영에 면죄부 주는 ‘기형적’ 평가 제도 바꿔야
부실한 공기업이 고용증대에 목메는 현상을 막기 위해 평가체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홍 교수는 “역대 정부에서도 정부가 강조하는 정책방향을 공공기관 평가에 반영하기는 했다. 하지만 작은 가산점을 주는 형태지 22점짜리나 되는 평가기준을 신설하는 식은 아니었다”며 “(평가기준의 전면 개편보다) 가산점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성 교수는 “공공성을 배제하라는 게 아니라 공공성을 지속 가능한 형태로 유지하기 위해 공기업이 재무적 안정성이 담보된 상태가 돼야 한다”며 “평가 방식도 그런 방향이 돼야 한다. 기본적인 재무적 성과가 충족이 안되면 사회적 가치를 충족해도 점수를 주기 어렵다”고 말했다.
애초에 경중을 판단할 수 없는 기업성과 공공성 두 항목을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김 교수는 “한 평가체계 안에서 공공성과 수익성의 경중을 따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공공성을 평가한다는 건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방향을 공기업이 얼마나 달성했냐를 보는 것인데 그 성적을 수익성적과 함께 놓고 무엇이 더 큰지 결정하기는 힘들다. 그 둘을 하나로 놓고 보려니 평가하는 사람들도 죽을 맛이고 평가에 들어가는 노력도 너무 크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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