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생활건강 기술연구원은 지난해 회사 신년사가 발표된 직후 비상이 걸렸다. 회사 경영을 진두지휘하는 차석용 부회장은 신년사에서 “품질·안전·환경 이슈들을 사전에 파악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해 사업 성과와 브랜드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을 제거하자”며 “법규를 뛰어넘어 소비자가 완전히 안심하고 만족하는 수준의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화학제품에 대한 소비자 공포가 확산되고 환경보호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이에 걸맞은 큰 변화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현행법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안전 기준을 적용하면서 소비자가 만족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경영진의 주문은 연구·개발 부서에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친환경’이 향후 제품 개발의 핵심 키워드가 되면서 연구소 직원은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 향의 지속성을 포기하다
연구진에게 첫 번째 떨어진 미션은 모든 섬유유연제 제품에 ‘미세플라스틱’을 쓰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미세플라스틱은 5mm 이하의 합성화학물질로 섬유유연제의 향기를 지속시켜주는 일종의 보호막 역할을 한다. 물세탁 후 섬유유연제의 향이 한동안 옷에 남아있는 것은 이 미세플라스틱이 향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이를 ‘향기캡슐’이라고 부른다. 길게는 열흘까지 향을 지속시켜 주기 때문에 대부분 섬유유연제에는 미세플라스틱이 들어있다. 섬유유연제처럼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생활화학제품의 미세플라스틱 함유량은 화장품에 비해 2.7배나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미세플라스틱이 비(非)수용성, 비분해성 합성화학물질이기 때문에 수질에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미세플라스틱은 미생물에 의해 분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먹이사슬을 따라 인간에게 돌아오거나 물 속에 쌓이게 된다. 섬유유연제 등을 통해 배출되는 미세플라스틱 양은 연간 13.5t으로 추정된다.
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미세플라스틱 사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학계 일부에선 미세플라스틱이 몸속으로 들어갈 경우 인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올해 초 화장품, 세정제 등 생활용품과 페인트, 광택제 등에 들어있는 미세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영국에선 일부 생활용품의 미세플라스틱 첨가를 금지했다. 국내에서는 2017년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화장품, 치약 등 의약외품에 대해 미세플라스틱 사용 금지 조치를 내렸지만 환경부 소관인 생활화학제품에 대해선 아직까지 규정이 없다. ○ 매출 대신 소비자 안전 택한 LG생활건강
환경 이슈가 있다 해도 생활용품을 만드는 회사가 미세플라스틱을 포기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소비자가 제품을 선택할 때 향이 얼마나 지속되는지를 고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6월 LG생활건강은 미세플라스틱을 모든 제품에서 사용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별도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향기캡슐’을 포기한 LG생활건강에 대해 업계에선 매출 하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사내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경영진의 의지는 확고했다. 이정래 LG생활건강 기술연구원 생활용품 홈케어 연구부문장은 “미세플라스틱을 쓰지 않으면 기존보다 향의 지속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매출 하락의 위험이 컸지만 당장의 손해를 보더라도 지속가능한 쪽으로 가는 게 맞다는 게 경영진 판단”이라며 “소비자 안전과 환경을 고려한 최선의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향을 둘러싼 향기캡슐이 사라지면서 LG생활건강 섬유유연제의 향 지속성은 뚝 떨어졌다. 실제 옷의 부드러움보다 향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비자들은 미세플라스틱이 함유된 타사 제품을 더 선호했다. 모든 제품에서 미세플라스틱을 뺀 지난해 9월 이후 매출이 일부 하락했지만 친환경 제품에 대한 소비자 관심이 커지면서 다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LG생활건강은 향기 캡슐을 대체할 친환경 물질을 개발하고 있다. 대체 물질에 대한 연구개발(R&D) 예산도 매년 확대하고 있다. LG생활건강 관계자는 “향기캡슐을 대체할 수 있는 향 지속 물질을 개발하고 있다”며 “조만간 소비자에게 선보일 예정이며 앞으로도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친환경 제품 개발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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