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경영-인사권 행사도 트집 잡을 우려… 노사갈등 새 불씨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17일 03시 00분


‘직장 괴롭힘’ 지침, 기업 흔드는 민노총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첫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16일 기업들에서는 사내 문화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반응과 함께 애매한 규정 때문에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함께 나왔다. 경기 수원시의 고용노동부 경기지청에서 민원인이 상담을 하는 모습. 수원=뉴시스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첫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16일 기업들에서는 사내 문화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반응과 함께 애매한 규정 때문에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함께 나왔다. 경기 수원시의 고용노동부 경기지청에서 민원인이 상담을 하는 모습. 수원=뉴시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첫날인 16일 한국석유공사 관리직 직원 19명은 오전 9시 고용노동부 업무가 시작되자마자 울산지청 민원실을 방문해 진정서를 제출했다. 사측이 직장 내 괴롭힘을 자행했다는 진정을 고용부에 제기한 것이다.

석유공사에서 20, 30년간 재직해온 이들은 지난해 3월 새 사장이 부임하면서 전문위원이라는 명목으로 직급이 2, 3등급씩 강등돼 월급이 깎였다고 진정서에서 밝혔다. 또 청사 내 별도 공간에 격리돼 별다른 업무도 받지 못했고 회사는 매월 혼자서 할 수 있는 과제를 제출하도록 하고 분기별로 후배 직원들 앞에서 발표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이들 모두 지난해 인사평가에선 최하위 점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위원들은 올 1월 노조를 결성한 뒤 4월 울산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에 부당 전보 구제 신청을 제기했다. 지노위는 지난달 27일 부당 전보 판정을 내렸지만 사측은 불복해 중앙노동위원회에 재판정을 요구한 상태다.

경영계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면서 석유공사와 같은 사례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애초에 괴롭힘 금지법은 간호사 ‘태움(선배 간호사가 수습 간호사를 지나치게 엄하게 교육하는 규율문화)’ 등을 방지하고자 만들어졌지만 노동계가 사측을 압박하는 또 다른 투쟁 수단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커졌다.

특히 경영계는 이날 민노총이 내린 지침 중 구조조정이나 성과 요구 과정에서 나온 회사의 경영활동을 괴롭힘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민노총은 총 36가지 사례를 직장 내 괴롭힘 행위로 들었다. 이 중 ‘훈련, 승진, 평가, 보상, 배치, 일상적인 대우 등에서 차별하는 행위’와 ‘성과(실적)목표 및 성과 미달 시의 불이익을 경쟁적이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압박하는 행위’가 특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지침에서 민노총은 “그동안 회사의 경쟁과 성과에 대한 요구는 고도의 경영 권한에 속하는 사항으로 교섭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엄격하게 보호해 왔다”며 “직장 내 괴롭힘 관련법 시행을 계기로 노조는 과도한 성과 요구 행위를 규제하는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고 했다. 민노총은 가능한 사업장에서는 이를 단체협약에 명시하고 노조원이 과반이 안 되는 곳 등은 취업규칙에 반영하도록 했다.

자동차업계의 한 관계자는 “사실상 경영을 압박하는 행위로 향후 임·단협 과정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매년 무리한 주장이 늘어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조영길 노동 전문 변호사는 “사용자의 정당한 지시와 감독도 범죄가 될 수 있다”며 “민노총의 지침이 향후 취업규칙 제정·개정 과정에 반영되고 일부 시민사회와 법조계 등이 동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노동계의 투쟁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준희 한국경영자총협회 수석위원도 “만일 취업규칙이 민노총 주장대로 반영되면 앞으로 성과 향상 프로그램 이수 등의 요구조차 괴롭힘이 된다”고 했다.

민노총은 또 노동조합이 조합원을 확대하기 위한 가입 활동은 노동조합의 존속 및 단결을 강화하기 위한 기본적인 활동이라 근로자들이 부담을 느끼거나 불편해하더라도 괴롭힘 금지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상당수 대기업은 고용노동부가 법 시행에 앞서 취업규칙(사규)을 바꾸도록 한 만큼 이미 취업규칙을 변경했다. 삼성중공업의 취업규칙에는 △신체에 대해 폭행하거나 협박하는 행위 △지속 반복적인 욕설이나 폭언 등을 직장 내 괴롭히는 행위로 정의했다.

한 대기업 노무 담당 관계자는 “향후 취업규칙 제정·개정 과정이나 단체협약에 민노총의 지침을 개별 노조가 반영하겠다고 주장할 경우 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미 민노총 산별노조 중 최대 규모이자 가장 강성인 금속노조는 민노총 지침을 토대로 ‘일터 괴롭힘 금지 세부지침’을 마련해 개별 기업단위에서 이를 취업규칙 제정·개정에 적극 반영하도록 했다.

직장 괴롭힘 금지법 위반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는 사측에 가해자 징계 등 원하는 조치를 요구할 수 있다. 만약 사측을 믿기 어렵거나 조치가 미진하다고 판단되면 관할 노동청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다. 노동청은 직장 괴롭힘이 실제 있었는지를 조사해 사실이면 필요한 조치를 사측에 요구한다. 하지만 이는 행정처분이나 시정명령이 아니라 응하지 않아도 과태료를 내거나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다.

단, 신고자나 피해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준 사실이 근로감독관에게 확인되면 해당 사업주는 입건되고 검찰에 송치된다. 검찰이 기소하고 법원이 혐의를 인정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

김도형 dodo@donga.com·배석준·유성열 / 울산=정재락 기자

#직장 내 괴롭힘 금지#시행 첫날#민노총#노사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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