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배또롱감귤농장’. 비닐하우스 안에선 한라봉과 천혜향을 접목해 만든 품종인 황금향의 열매가 짙은 녹색에서 황금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달 말이면 탱탱한 과육과 높은 당도의 황금향이 전국의 소비자를 찾아간다.
일일이 사람 손을 들여야 해 정신없을 것이란 생각과 달리 농장은 평온했다. 농장주 오길원 씨(40)는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어슬렁거리며 가끔씩 장비만 살펴볼 뿐이었다. 오 씨 외에 다른 일꾼도 보이지 않았다. 오 씨는 “스마트팜 시설을 도입하면서 공무원처럼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9 to 6)’이라는 목표를 이뤘다”면서 “자기 계발에 투자할 시간도 생겼다”며 환하게 웃었다.
○ 스마트폰으로 원격 제어하는 여유로운 농부
비닐하우스엔 출입구와 보일러 상태를 확인하는 폐쇄회로(CC)TV 카메라 2대, 광학줌카메라 1대 등 모두 3대의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광학줌카메라는 황금향 감귤나무 잎에 총채벌레나 진딧물이 생기는지 관찰한다. 집에서도 카메라를 조작해 모기보다 작은 병해충까지 확인할 수 있다.
병해충이 발생할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무인방제기를 가동해 약을 살포한다. 천장의 창문이나 보온커튼 등도 자동으로 제어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우스의 실내온도가 높아지면 배기 팬을 돌려 온도를 낮추고, 적정 온도보다 낮아지면 난방기를 가동한다.
땅에는 지열을 측정하는 장비가 설치돼 있다. 하우스 내 습도, 온도, 이산화탄소 농도 등의 데이터를 수집하는 장비도 달렸다. 이 모든 장비를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조작할 수 있다. 오 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스마트폰으로 비닐하우스 상태부터 점검한다”며 “실시간으로 온도, 습도 등을 확인하고 카메라를 원격 조종해 집 안에서도 농장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수준의 복합제어 시스템을 갖추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호텔에 근무하며 주말에 아버지의 감귤농사를 돕던 오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012년 본격적으로 감귤 전업농이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고민도 많았다. 노지에서 옛 방식대로 농사를 짓던 아버지처럼 과수원에 모든 시간을 빼앗기고 싶진 않았다. 여느 직장인들처럼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여유로운 여행을 하는 생활을 바랐다.
비닐하우스를 자동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존 설비는 설정한 온도와 습도에 따라 자동으로 창문이 개폐되는 정도에 불과했다. 상황에 따라 하우스 내에서 설정값을 수동으로 조절해야 했다. 오 씨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외부에서도 제어가 가능한 장비를 원했다. 네덜란드 장비는 1억 원가량으로 엄두조차 내지 못하다가 보조금 지원을 받아 상대적으로 저렴한 국내 제어시스템을 2015년 설치했다.
시스템을 갖췄다고 끝이 아니었다. 제대로 가동하려면 각 부품의 기능을 숙지해야 했다. 모형 자동차나 비행기 제작이 취미여서 기계에 관심은 많았지만 독학으론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비슷한 고민을 하는 감귤농부 20여 명이 만든 ‘스마트팜 연구회’의 도움을 받고 있다. 전기, 전자, 컴퓨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갖춘 귀농인들과 정보를 공유한다.
복합제어 시스템을 갖춘 덕에 큰 피해도 줄일 수 있었다. 올해 3월 계속된 추운 날씨로 열풍기가 쉼 없이 돌아가다 화재가 발생했다. 비닐하우스 실내온도와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자 시스템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배기 팬이 작동해 연기를 빼냈고 자동확산소화기가 가동해 불길을 빠르게 잡을 수 있었다. 비닐하우스가 전소되는 큰 사고로 번질 수 있었지만 천장 일부만 타는 정도로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 인공지능으로 발전하는 스마트팜 구상
스마트팜에서 자신감을 얻은 오 씨는 2년 전 레몬, 블루베리 농장을 새로 조성했다. 스마트팜 설비로 관리하는 농장은 3곳 1만5000m² 규모인데, 모두 오 씨 혼자 관리한다. 혼자서도 관리할 수 있도록 △레드향(한라봉과 온주밀감 교배품종) 1∼2월 △천혜향(오렌지와 온주밀감 교배품종) 3월 △블루베리 5월 △황금향 8∼9월 △노지감귤 11∼12월 등으로 재배 품종을 다양화하고 수확 시기를 세분했다. 흉작에 따른 가격 폭락 등 리스크를 분산하고, 매달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다.
최근 오 씨는 전기제어 컨트롤박스를 제작하는 교육을 받는 등 배움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스마트팜에 필요한 부품을 직접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지금도 생활용품을 응용해 간단한 제어장치는 직접 만든다.
인공지능(AI)과의 접목도 구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북풍이 다소 세게 불면 북쪽 창문을 닫고 남쪽 창문을 열어 비닐하우스 온도를 자동으로 유지하는 식이다.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외부 환경의 변화에 맞춰 AI가 스스로 제어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스마트팜 덕분에 노동력을 30% 이상 절감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기대만큼 수익이 증가한 것은 아니다.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결국 농산물의 품질이 핵심인데 기술이 품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 씨는 최상의 품질을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생육환경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할 생각이다.
“감귤농장 이름에 넣은 배또롱은 배꼽을 뜻하는 제주 방언입니다. 처음에 남들 따라 황금향을 재배할 때 꼭지 반대편 부분이 배꼽처럼 볼록 튀어나온 불량품이 수두룩했어요. 초보 농부 때의 실패를 잊지 않고 최고의 스마트팜 시스템에 걸맞은 최고 품질의 감귤을 생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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