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싱크탱크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8일 저물가 원인을 수요 위축으로 꼽은 것은 경제 부처의 경기 인식에 오류가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은행의 통화정책도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KDI는 특히 최근 발생한 ‘디플레이션 논쟁’을 의식한 듯 현 상황이 디플레이션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저물가가 장기화하는 것 자체가 우려할 만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KDI는 이날 보고서에서 “수요 위축이 물가상승률 하락의 주요 원인”이라며 “디플레이션뿐 아니라 낮은 물가상승률 자체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했다. 그간 한국은 디플레이션 상황이 아니며 물가상승률 하락은 공급 요인에 따른 일시적 요인일 뿐이라고 설명해 온 정부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9월 소비자물가가 전년 동월 대비 0.4% 떨어지며 물가상승률이 두 달 연속 마이너스(―)를 보이자 정부는 지난해 폭염으로 농축산물 가격이 급등한 데 따른 기저효과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KDI는 공급 요인뿐 아니라 수요 위축도 물가상승률을 끌어내린 주요 요인으로 분석했다. 올해 1∼9월 물가상승률(0.4%)이 2013∼2018년 평균(1.3%)보다 0.9%포인트 낮은데 이 중 날씨나 유가의 영향 등 외부 요인의 영향을 받는 식료품과 에너지의 기여도는 ―0.2%포인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반면 식료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나머지 상품(―0.3%포인트), 외식비와 교통비 등 서비스(―0.4%포인트)가 물가 하락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이들 품목의 가격은 소비 증감과 직결된다. 복지정책의 영향을 제외한 물가지수 상승률(0.5%)도 미미해 전반적으로 수요가 쪼그라든 것으로 봤다.
KDI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유로존 등은 경기 회복과 함께 물가상승률이 반등한 점에도 주시했다. 한국이 국제 추세와 달리 성장률이 떨어지고 물가가 계속 하락하는 중장기 하락 추세에 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일시적 공급 요인이 아닌 수요가 감소해 저물가가 이어지는 경우 경제 전체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수요의 양축인 소비나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기업이 상품의 가격을 올리지 못해 물가가 떨어진다. 물가가 떨어지는 기조가 장기화하면 소비자들은 앞으로 가격이 더 떨어질 것을 예상해 소비나 투자 대신 저축으로 눈을 돌리고 이는 다시 물가 하락, 소비 위축, 경기 침체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정규철 KDI 경제전망실 연구위원은 “소비가 줄어든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건 소득 감소”라며 “정부가 재정 확대를 통해 투자를 늘리고 있지만 민간 소비가 더 안 좋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KDI는 또 한은이 물가 안정이 아닌 금융 안정을 더 중시한 탓에 물가 관리에 실기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은은 지난해 근원물가(농산물, 석유류 제외 물가) 상승률이 물가안정 목표(2.0%)에 못 미치는 1% 안팎에 불과했지만 기준금리를 0.25% 인상했다. 정 위원은 “통화정책이 물가안정을 최우선의 목표로 수행되면 디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은 낮다”며 통화정책이 시급한 과제임을 에둘러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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