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인 8명 중 1명은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2일 영국 런던 윌스든그린에 자리한 커뮤니티센터 ‘애슈퍼드’에서는 지역 노인들을 위한 무료 점심 배식이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이날 음식을 제공한 자선단체 ‘페어 셰어’의 운영진 크리스티 개럿 씨는 “정부에서 나오는 연금이 넉넉지 않은 데다 연금 개시 시점이 65세, 66세로 점차 미뤄지며 은퇴자들의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노인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면서 지하 식당 30여 석의 자리는 순식간에 다 찼다. 일부 노인은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만난 노인들은 팍팍한 살림살이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블루칼라’ 노동자였던 탓에 유일한 버팀목이 공적연금뿐인데 그마저도 매우 부족하다는 하소연이었다. 식사를 하고 있던 조지프 씨(84)는 “건설노동자로 일했기 때문에 직장연금에 가입하지 못했는데, 정부 연금은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늙어가는 나라들은 이제 늘어나는 빈곤 노인들로 신음하고 있다. 노인들은 충분치 않은 연금, 쥐꼬리만 한 예금 이자와 씨름하다가 질병 등 예기치 못한 변수가 생기면 순식간에 빈곤 노인으로 전락한다. 경기침체로 재정난에 빠진 정부 역시 고령인구를 부양할 여력이 떨어져가고 있다. ○ “일자리는 끊기고…어느새 내가 노숙인이 됐다”
65세 노인 인구가 3588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8.4%에 달하는 일본은 이미 빈곤 노인 문제로 신음한 지 오래다. 일본의 연금 수준은 한국보다는 전반적으로 높지만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노인이 적지 않다.
실제로 지난달 29일 빈곤층 지원단체 ‘홋토플러스’가 운영하는 일본 사이타마현 무료 숙소에서 만난 다마키 씨(68)도 연금 혜택을 받지 못하고 불과 몇 달 전까지 총 8년여간을 노숙인으로 생활했다. 정육점에서 일하는 등 일용직을 전전했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살기 바빠 국민연금을 제대로 납입하지 못했던 탓에 연금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일자리가 끊기다 보니 어느 순간 노숙인이 돼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오랜 노숙 생활로 몸이 상해서인지 다마키 씨의 방에는 파스와 각종 근육통 완화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상대적으로 경기가 괜찮은 미국에서도 ‘빈곤 노인’은 남의 일이 아니다. 미국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A 씨(50)는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인 ‘401(K)’에 늦은 나이인 40세에 가입했다. 회사 기여분을 포함해 연봉의 15% 정도를 꼬박꼬박 불입해 퇴직연금 계좌에 17만 달러(약 1억9700만 원) 정도가 있지만 30세부터 연금을 불입한 또래들이 30만 달러 정도를 쌓아 놓은 것에 비하면 노후 준비가 늦었다. 집 한 채와 연금이 전 재산인 그는 요즘 노후 걱정을 하고 있다.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학자금 부담까지 불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학자금을 대기 위해 퇴직연금에서 대출을 받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늦더라도 퇴직연금을 꼬박꼬박 납부한 이들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은퇴 시점에 퇴직연금이 너무 적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많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미국 성인 인구의 55%만이 직장 내 연금 프로그램에 가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켓워치에 따르면 미국 가정의 64%가 은퇴 후 자금 부족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 청년이 부양해야 하는 빈곤노인, 사회 갈등 촉발
노후 빈곤 문제는 세대 간 갈등으로도 번지는 모양새다. 늘어나는 노령인구 때문에 갈수록 짊어져야 할 연금보험료 부담이 커지자 청년실업으로 신음하는 젊은층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영국에서 만난 한 금융회사 연금담당 직원은 “영국의 경우 그해 필요한 연금 재원을 그해 가입자의 세금으로 마련한다”며 “젊은 세대의 세금으로 노년층의 생활비를 충당하는 구조이다 보니 세대 간 갈등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탄탄한 복지를 자랑하는 독일에서도 젊은층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헤드헌팅 업체 직원 레아 베버 씨(24)는 “부모 세대는 평생 일하면 충분한 연금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우리가 이제 그것만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것 같다”고 말했다.
빈곤 노인 문제를 다룬 베스트셀러 ‘하류노인’의 저자인 후지타 다카노리 홋토플러스 대표 겸 세이가쿠인대 준교수는 취재팀과 만나 “노후에 대한 공포 때문에 중장년층이 허리띠를 졸라매 소비가 줄고, 젊은층은 아이를 낳지 않으면서 저출산이 가속화된다”며 “노인 빈곤은 결국 경제 전체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도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이직 교육-투잡 허용… 회사가 ‘인생2막’ 지원 ▼
獨 보쉬, 은퇴직원을 ‘상담역’ 활용… 日 다이킨공업, 실버 베테랑 재고용
지난달 31일 찾은 덴마크 코펜하겐의 금융노조는 퇴직을 앞두거나 전직을 고려하는 은행원을 위한 일종의 ‘재교육 사관학교’였다. 일반 지점의 창구 업무를 보던 직원은 이곳에서 기업금융이나 핀테크 분야, 또는 아예 다른 업종으로 이직하기 위한 직업교육을 받는다. 이 프로그램은 은행권과 정부가 공동 출연한 자금으로 진행된다. 은행원들이 노후 준비 없는 갑작스러운 퇴직으로 자금난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제2의 커리어’를 준비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미샤엘 부돌프센 덴마크 금융노조 부위원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 금융업계 실직률이 20%까지 치솟았다”며 “이를 계기로 재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다른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저성장, 저금리로 직격탄을 맞은 금융회사를 비롯해 글로벌 기업들이 시니어급 인력의 운용 방안을 놓고 고심하고 있다. 경영 악화로 대규모 감원에 나선 곳도 있지만 덴마크 금융노조처럼 고령 근로자를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곳도 적지 않다.
일본 3대 메가뱅크 중 하나인 미즈호파이낸셜그룹은 기밀정보 유출 우려가 있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직원들에게 ‘투잡’을 허용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미즈호 직원도 ‘○○스타트업 직원’이라는 명함을 파고 겸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 보수적인 일본의 금융회사가 이런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 것은 그만큼 회사 경영과 직원 고용유지에 대한 위기의식이 컸기 때문이다. 직원들이 회사 밖에서 스타트업 등 다양한 체험을 하는 게 저금리 시대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미즈호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독일의 보쉬는 이미 1999년 ‘보쉬 매니지먼트 서포트’라는 컨설팅 자회사를 설립해 자사 은퇴 직원을 사내 컨설턴트로 활용하고 있다. 베테랑 은퇴 직원들은 ‘시니어 전문가’로서 그간 쌓은 지식을 후배 직원들과 공유하는 한편, 필요할 경우 회사와 직접 고용계약을 맺고 일정 기간 근무하기도 한다.
일본 다이킨공업도 고령 인력 활용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능력만 있다면 65세가 넘은 직원도 고용하는 ‘시니어 스킬 스페셜리스트 계약직원 제도’를 도입했다. 이 회사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베테랑 고령 직원을 1년 단위로 계속 고용한다. 일본 기업들은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60세 정년+5년 계약직 추가’보다 고령 근로자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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