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이 불던 5일 오후 경남 고성군 영오면의 파프리카 재배 단지. 비닐하우스들 사이에 설치된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임창규 공룡삼촌농장 대표(32)가 PC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란히 놓인 모니터 4개는 각기 역할이 달랐다. 서류와 이메일 등을 작성하는 용도를 제외한 나머지 3대는 모두 하우스 내 상황을 관리하고 있다. 그 덕분에 임 대표는 사무실에서 파프리카 나무와 각종 시설들을 폐쇄회로(CC)TV 화면을 통해 확인하고, 하우스 내 온도와 습도, 태양광 수준 등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점검할 수 있다.
공룡삼촌농장에서는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순 따기 등 일부 작업을 빼고는 햇볕 조절부터 물 주기까지 재배 과정의 대부분을 컴퓨터가 책임진다. 임 대표는 “스마트팜 덕분에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나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공대생이었던 임 대표가 농사를 짓겠다고 선언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모두 말렸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는 농사 경험은커녕 제대로 흙을 밟아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농사는 달랐다. 처음부터 PC로 데이터를 기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배 환경을 자동 제어하는 스마트팜을 구상했다. 그렇게 농사를 시작한 지 7년, 그는 연매출 10억 원을 올리는 어엿한 영농 청년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 청년 농부의 스마트팜 도전기
창원대 토목공학과에 다니던 임 대표에게 농사를 권한 사람은 외삼촌이었다. “농사를 지어보니 수익이 괜찮다”는 얘기였는데, 처음에는 한 귀로 흘려들었다. 이후 농사 규모를 키우는 데 필요한 땅을 알아봐 달라는 외삼촌의 연락을 다시 받았다. 그게 전환점이 됐다. 땅이 좋아 관련된 일을 하려고 토목공학과에 진학했던 그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농사에 빨려 들어갔다.
농장 경영을 해보겠다는 아들의 선언에 아버지는 격렬히 반대했다. “대학을 나오면 넥타이 매고 펜대 굴리며 살 것이라 믿었다”며 뚱딴지같은 소리로 여겼다. 아버지는 반년 가까이 그의 인사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하우스 일을 배우겠다고 비닐가게에서 일하고, 부추 농장을 찾아다니며 착실하게 농부 준비를 하는 아들의 모습에 아버지는 마음을 돌렸다.
임 대표는 경남과학기술대 원예학과로 편입한 이듬해인 2013년 본격적으로 농장 일에 뛰어들었다. 8300m² 규모의 비닐하우스 1개 동에 기상대(기후 측정 시설)와 자동으로 제어되는 천창, 환기팬, 양액기(작물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장비), 난방기, 이산화탄소 공급 장치 등을 설치했다. 임 대표는 “스물여섯일 때라 일단 농사를 편하고 재밌게 짓자는 생각이 컸다. 농사도 게임처럼 접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학교에서 각종 벌레에 대해 배웠지만 하우스에서 잎을 갉아먹는 ‘그 해충’이 어떤 종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농약을 구했지만 냄새만 맡아도 기침이 나고 살갗이 일어나는 부작용 때문에 제대로 사용하기조차 힘겨웠다. 그럴 때마다 스마트팜을 만드느라 생긴 빚 10억 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명증이 생기고,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이 우수수 빠졌지만 악바리처럼 2년을 버텼다. 그는 교육기관과 스마트팜 업체, 국내외 선진 농가 등을 쫓아다니며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사계절을 몇 차례 겪자 데이터가 쌓이고, 최적의 재배 환경도 만들어졌다. 해충을 막기 위해 외국에서 농약 대신 활용할 천적도 들여왔다. 임 대표는 “농약 알레르기도 있고 농사는 체질적으로 안 맞지만 스마트팜은 나에게 딱 맞는다”며 웃었다.
계속된 노력은 성과로 이어졌다. 노지에서는 3.3m²당 파프리카를 20kg 정도 수확하지만 공룡삼촌농장에서는 평균 60kg을 수확한다. 재배 환경을 연중 균일하게 유지해 규격이나 모양도 뛰어나다. 2015년에는 스마트팜 시설을 갖춘 1만3200m² 규모의 비닐하우스 1개 동을 추가로 지을 수 있었다. ○ “농사는 사람보다 기계가 잘 지어”
공룡삼촌농장을 찾은 5일은 임 대표가 올해 처음 심은 신품종인 바나나파프리카를 처음으로 수확하는 날이었다. 커다란 고추처럼 생긴 바나나파프리카는 일반 파프리카보다 크기가 크고, 비타민C도 더 풍부하다.
기온 28도, 습도 80%로 맞춰진 비닐하우스에 들어서니 한파가 무색하게 후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직원들이 갓 딴 다양한 색깔의 바나나파프리카를 상자에 담고 있었다. 임 대표는 “신품종에 도전해 보려고 네덜란드로 가 이것저것 다 먹어본 뒤 골라온 품종”이라며 하나를 건넸다. 무농약 제품이라 그대로 한입 베어 무니 일반 파프리카보다 달고 아삭했다.
바나나파프리카는 사실 임 대표에게 모험이다. 그간 키워온 일반 파프리카는 재배 데이터가 충분히 쌓였고 판로도 안정적이다. 농업회사법인 코파㈜(코리아 파프리카의 줄임말)를 통해 전량 일본으로 수출한다. 그런 파프리카를 키울 수 있는 공간을 포기하고 8300m²짜리 하우스 1개 동 전체에 신품종을 심은 것이다.
그는 신품종에 적합한 재배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한동안 매일 나무를 관찰하고 기온, 습도 등을 추적했다. 올해 5월에는 직접 판매처를 발굴하려고 일본의 업체들을 찾아가 “네덜란드 파프리카보다 맛있다. 열심히 하겠다”며 구애했다. 다행히 두 곳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날 포장한 상품들은 이곳으로 보낼 시제품이다.
임 대표의 과감한 도전은 시행착오 속에 다져진 자신감에서 비롯됐다. 그는 “금수저도 아니고,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닌 내게 스마트팜은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지금은 일 배우고 싶다고 진지하게 연락해오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또래 직장인보다 높은 수익을 올린다.
7년 차 청년 농부는 창농을 고려하는 청년들에게 “농업은 블루오션이지만 막연한 환상으로 들어왔다가는 고생만 한다”며 신중하게 선택할 것을 당부했다. 오랜 경험의 농부들이 가진 ‘감’이 없을뿐더러 갈수록 농산품 단가가 떨어지는 환경에서 의지만으로 버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젊은층이 농사를 시작할 때 해법은 경제적이고 과학적인 농업을 할 수 있는 스마트팜에 있다는 게 임 대표의 결론이다. 그는 “농사를 지으려면 무조건 스마트팜으로 승부를 보라. 농사는 사람보다 기계가 잘 짓는다”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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