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기업이 제기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에서 한국 정부의 첫 패소가 확정됐다.
금융위원회는 21일 “대우일렉트로닉스(이하 대우일렉) 매각 과정에서 불거진 이란 다야니 가문과 한국 정부 간 ISD에서 영국 고등법원이 기존 중재 판정을 취소해 달라는 한국 정부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한국은 당장 730억 원의 국고 손실이 불가피해지게 됐다. 또 이번 판정이 외국 투자자와의 ISD에서 패배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앞으로 이어질 조(兆) 단위 ISD 소송 결과도 장담할 수 없게 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 대우일렉 매각 계약금 등 730억 원 반환해야
이 사건은 2010년 이란 다야니 가문이 대우일렉을 인수하려다가 실패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대우일렉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다야니 측은 싱가포르 법인을 통해 한국 채권단에 578억 원의 계약금을 지급하고 투자확약서(LOC)를 제출했다. 하지만 채권단은 LOC에 적힌 다야니 측의 자금 여력이나 채무 승계 계획 등이 부실하다고 보고 인수 계약을 해지해버렸다. 대우일렉 인수에 실패한 다야니는 계약금 578억 원이라도 돌려달라고 했지만 채권단은 “계약 해지의 책임이 다야니에 있다”며 이를 거부했다.
이에 다야니는 채권단 중 한 곳인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정부 측 기관이라는 이유를 들어 2015년 9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했다. 이 소송을 심리한 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 중재판정부는 2018년 6월 한국 정부가 계약금과 지연 이자 등을 더해 730억 원을 다야니 측에 지급해야 한다고 판정했다. 그러자 정부는 “다야니의 소송 대상은 한국 정부가 아닌 채권단이기 때문에 애초에 ISD 대상이 아니다”라며 즉각 판정 취소 소송을 냈다. 그러나 중재지인 영국 고등법원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기존 판정이 그대로 확정됐다.
이번 판정은 국제 중재소송에서 최종 판결의 효력을 갖기 때문에 정부는 결국 다야니 측에 730억 원을 돌려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계약금으로 받았던 578억 원은 채권단 계좌에 남아 있어 그대로 반환하면 되지만 150억 원이 넘는 지연 이자를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긴급 관계부처 회의를 소집해 대응 방안을 논의한 정부는 판결문 분석과 계약금 반환 등 후속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정부 관계자는 “당시 채권단과 배상 문제에 대해 추가로 협의해야 한다”며 “모든 절차가 끝나면 상세한 중재 내용을 공개할 것”이라고 했다.
○ 조 단위 ISD 후폭풍…“근본 대응책 필요”
이번 소송에서 한국의 패소가 확정됨에 따라 정부 안팎의 긴장감은 커지고 있다. 일각에선 이번 패소 확정으로 앞으로 줄줄이 이어질 ISD에서도 한국이 승소를 확신할 수 없게 됐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가장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건 소송 금액이 5조 원에 이르는 론스타의 ISD다. 론스타는 한국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고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했다며 2012년 ISD를 제기했다. 이 소송의 최종 심리는 2016년 6월 종료됐지만 판정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속 지연되고 있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르면 내년 판정 결과가 나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과 메이슨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개입해 자신들이 손해를 봤다는 이유로 1조 원 규모의 ISD를 제기했다.
이번 다야니 가문에 대한 판정이 투자자에게 더 유리할 수밖에 없는 ISD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분석도 있다. ISD가 애초부터 투자자 보호를 위해 생겨난 제도이고, 실제 통계를 봐도 정부에 대한 기업의 승소율이 60∼70%에 이른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에 대한 ISD 제기가 앞으로 계속될 수 있는 만큼 근본적인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한국은 정권 교체에 따라 정책이 급격하게 바뀌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외국 기업에 소송 빌미를 더 쉽게 제공할 수 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각국과 무역협상을 하면서 투자협정을 새로 만들고 ISD 조항을 제외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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