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지키는게 최우선 관심… 장관끼리도 “영역 침범말라” 언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6일 03시 00분


[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2020 新목민심서-공직사회 뿌리부터 바꾸자]
<3> 칸막이 행정에 업무협력 뒷전

“밖에 다 들리겠어요. 목소리 좀 낮추세요.”

지난해 6월 26일 서울 중구 한국관광공사 서울센터 회의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스마트공장 정책의 주도권을 놓고 언쟁을 벌이자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말리고 나섰다.

박 장관은 이날 산업부가 경제활력대책회의에서 섬유패션산업과 관련한 제조공정을 혁신하는 정책을 발표하자 중기부 영역을 침범했다며 항의했다. 스마트공장 보급과 섬유패션 같은 영세 산업의 진흥은 중기부 담당이라는 것이다.

박 장관은 “아직도 중기부가 산업부의 ‘작은집’인 줄 아느냐”고 말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 장관이 “이미 실무진에서 협의했다. 중기부와 겹치지 않는 정책”이라고 반박하자 박 장관은 “협의 사실을 보고받은 적이 없다”고 맞섰다. 회의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언쟁이 심상치 않아 참석한 장차관들이 순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며 “산업부와 중기부의 영역 다툼이 커지는 듯했다”고 전했다.

이날 두 부처 장관이 충돌한 것은 정책 주도권을 쥐는 것이 부처 예산 규모나 규제 권한 등 영향력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공무원이 일을 적극적으로 하려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막상 빛이 안 나고 위험이 따르는 업무는 서로 맡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부처 간의 고질적인 영역 다툼 때문에 정작 시급한 정책과 규제 문제는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 “부처 몫 잘 지켜야 일 잘하는 공무원”


2015년 말 국무조정실 규제조정실은 농축산물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HACCP·해썹) 통합 작업을 진행했다. 축산물 해썹 인증은 농림축산식품부가, 그 외 다른 품목 인증은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해왔지만 앞으로는 모든 인증을 식약처로 일원화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인증 기관의 통합이 필요했던 것은 식품가공 기업들의 불편함 때문이었다. 육가공 식품만 팔다가 제품에 감자와 삶은 채소도 곁들이게 된 한 업체는 두 부처에서 해썹 인증을 받아야 해 비용과 시간이 2배로 든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에 규제조정실은 미국처럼 인증 일원화를 추진했지만 농식품부는 “가공 전 축산물 위생 점검이 필요하니 해썹 인증도 계속 우리가 해야 한다” 등의 논리를 들어 반대했다. 심지어 “그 기업은 고기만 팔면 되지 왜 채소까지 파느냐”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회의는 5차례나 이어졌고, 결국 설득 끝에 식약처 소관으로 정리됐다.

2017년에 경제부처에서 국장급으로 퇴직한 A 씨는 “‘내 것(우리 부처 일)’ 잘 지키는 공무원이 일 잘하는 공무원이라는 인식은 반드시 손봐야 할 문제”라고 했다. 그는 “예산과 인력이 동반된 사업이 나오면 각 부처는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다”고 했다.

실제로 최근 정부가 예산을 집중 투입하고 있는 4차 산업혁명 관련 업무는 부처 간 영역 다툼이 가장 격하게 벌어지는 분야다. 산업 정책 발표 때는 ‘관계부처 합동’임을 강조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핵심 사업을 따오기 위한 암투가 진행된다. 가령 자율주행차는 국토교통부와 산업부, 가상·증강현실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산업부 등이 샅바 싸움을 하고 있다.

○ 부처 간 칸막이의 그림자


반대로 사고가 잦아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는 업무, 빛이 나지 않는 업무는 부처 간 ‘핑퐁게임’이 벌어진다. 2013년 4월 첫 사망사고가 발생한 키즈카페는 통합 안전지침이 마련되기까지 5년 8개월이 걸렸다. “우리 부처의 일”이라며 먼저 나서는 부처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키즈카페의 안전관리 업무는 무려 6개 기관이 쪼개서 맡고 있다. 예를 들어 미끄럼틀, 그네 같은 무동력 놀이기구 안전기준 마련은 행정안전부, 설치 전 안전 인증은 산업부, 미니열차나 바이킹과 같은 동력으로 움직이는 기구의 안전 검사는 문체부, 마감재 유해물질 관리는 환경부, 음식물은 식약처, 소방시설은 소방청이 관리·감독하는 식이다.

소관 기관이 여러 곳이다 보니 키즈카페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해도 각 부처는 “그건 남의 책임”이라며 떠넘기기 일쑤다. 각종 산업 진흥 업무는 예산이나 인력을 추가 확보할 수 있는 데 반해, 안전사고 관리는 책임질 일만 많아 정부 내에선 대표적인 기피 업무로 꼽힌다.

34년간 공직생활을 하고 법제처장을 지낸 제정부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는 “부처가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권한이 축소되는 방향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면이 있다”며 “정책을 볼 때 부처의 시각이 아닌 국민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고 했다.

김준일 jikim@donga.com·고도예 기자
#공직사회#영역 다툼#공무원#칸막이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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